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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영어 단어 휴머(Humor)는 ‘유머, 익살, 해악’이라는 뜻입니다. Humor는 라틴어 Humanus에서 온 단어입니다. Humanus는 체액을 말합니다. 인체의 체액, 동물의 체액, 나무의 수액 같은 것을 Humanus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에는 네 개의 체액(혈액, 가래, 담즙, 흑담)이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체질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4체액의 배합 상태에 따라 사람의 멘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 의학의 관념이었습니다.
유머는 사람들의 몸에 흐르는 체액과 같다는 것입니다. 유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죠? 물이 있어야 식물이 잘 자랍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머가 있어야 웃으며 밝게 살 수 있습니다. 영어 우울증의 어원이 담즙이 검다는 뜻입니다. 웃음 없는 세상은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여러분! 웃으며 밝고 건강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선한 감성이 풍부하신 분이십니다. 또 기쁨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십니다. 그리고 웃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99세 할아버지와 89세 할머니에게 아들을 주신 다는 거예요. 너무 웃겨서 할머니 사라가 웃었습니다. 사라가 얼마나 우스웠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웃은 사람은 사라가 최초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정말로 웃기셨습니다. 오늘날 할머니가 아기를 낳았다고 해보세요. 정말 웃을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4천 년 전에 100세 할아버지와 90세 할머니가 아기를 낳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 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을 쉴 새 없이 시끄럽게 하는 성격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런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은 우레(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주님은 위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재미있으신 하나님이 나옵니다. 또 풍부한 감성을 가지신 시적인 하나님이 나옵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도우실까요? 하나님은 아주 기이한 방법으로 도우십니다.
<26절>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해 하늘을 타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타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카브’입니다. 라카브는 ‘올라타다’, ‘달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을 타고’라는 말은 ‘하늘을 말처럼 올라탔다’는 뜻입니다. 또 ‘하늘을 타다’라는 말은 ‘하늘을 달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기 위해 하늘을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아주 기이합니다. 하나님은 하늘만 달려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 위로도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77: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돕기 위해 물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사역하셨습니다. 그래서 피곤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밤 중에 쉬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다 속으로도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51: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2013년 5월 26일 오후 4시 30분 대서양 바다 한 가운데서 유조선을 예인하는 선박이 침몰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선박 제이슨 4호입니다. 제이슨 4호는 갑자기 선체가 기울어지면서 수심 30m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마침 사고 지점과 120km 떨어진 유전에서 네덜란드 업체, 'DCN 다이빙' 잠수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수부들은 시체 인양을 위해 급히 사고지점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잠수부들은 사흘 동안 시체 인양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장을 포함한 선원 열 한 명의 시신을 인양했습니다. 작업을 마치고 철수를 하려던 찰나이었습니다. 잠수부 한 명이 소리쳤습니다.
“저게 뭐죠?”
“살아있어요! 생존자가 있어요!”
배가 바다 속으로 침몰한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모두 죽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다 속에서 사흘 동안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배의 요리사 해리슨 오제그바 오킨이라는 사람입니다.
요리사 해리슨은 사고 당시 충격으로 기절했습니다. 그가 깨어났을 때 배는 수심 33m의 바다 속에 있었습니다. 해리슨은 바다 속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쳐 약간의 공기가 남아있는 에어포켓으로 이동했습니다. 식량은 콜라 한 병뿐입니다. 해리슨은 콜라 한 병으로 3일을 버텼습니다. 또 바다 속의 추위를 견뎠습니다. 그러면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 그것도 바다 속에서 점점 산소가 희박해지고 있었습니다. 해리슨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생존은 불가능하겠구나...’
그 때 사고 나기 바로 전에 아내가 핸드폰 문자 메시지로 보내준 시편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시편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해리슨은 대서양 바다 속에서 주님께 간절히 구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구조된 후 해리슨은 자신의 기도에 세심하게 응답해 주신 주님의 섭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일 동안 숨 쉴 수 있는 산소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 넓은 대서양에서 국적이 다른 잠수부가 사고 지점 근처에서 작업 중이었습니다. 산소가 거의 떨어질 때쯤 잠수부가 해리슨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가운 바다 속에서 삼일 동안 체온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기적이었습니다. 구조된 해리슨은 첫 인터뷰에서 짧은 한 마디로 이 기적을 설명했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늘에 하나님의 길이 있습니다. 바다 위에 하나님의 길이 있습니다. 바다 속에도 하나님의 길이 있습니다. 이 우주에 하나님의 길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자기 백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길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달려오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집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27절>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처소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메오나입니다. 메오나는 ‘굴, 피난처, 보금자리, 둥지’ 등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집이십니다. 집은 삶의 중심지입니다. 집에서 밥을 먹습니다. 집에서 잡니다. 집에서 쉽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집이 되시기 원하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우리의 집인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장막이라는 말이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성도들의 집인 곳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주일날 아침에 잠깐 짬을 내서 인사드리는 분쯤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하나님을 차에 기름이 떨어졌을 때 잠시 들리는 주유소쯤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멈춰 음료수 하나 마시는 휴게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거주해야 할 집이십니다.
사도행전17장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움직이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있습니다. 이 손에 진짜 안식과 양식이 있습니다. 이 손에 진짜 인도와 보호가 있습니다. 이 팔은 세상의 모든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우리의 집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곤고한 날의 은혜』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주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말 별장이나 여름휴가를 지낼 오두막 같은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휴가철에나 한 번 들르는 호텔이나 노년에 이용하는 양로원 쯤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지붕 아래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본가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생활 근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집이 되고 싶어 하십니다. 정말 새로운 생각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닌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신적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살 집이 아닌 신비하고 기적적인 일만 행하시는 분으로 간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활할 수 있는 집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찾는 창조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 이상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 분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를 바라십니다(행17:28).
송명희 시인의 <하나님은 나의 집>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세상이 흔들리는 갈대라면
하나님은 요동치 않는 반석
세상이 어두운 밤이라면
하나님은 어둡지 않은 대낮
세상이 잠시 있는 안개라면
하나님은 항상 계시는 피난처
세상이 잠간 거할 장막이라면
하나님은 영원히 거할 나의 집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을 자기 백성들에게 이슬을 먹이시는 분이십니다.
<28절>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야곱이 샘이 이슬이 내리는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슬을 내리는 곳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슬은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미가5:7>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호세아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시편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스라엘 날씨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집니다. 1년 중에 반은 비가 옵니다. 나머지 반은 비가 전혀 오지 않습니다. 건기에도 곡식이 자랍니다. 물이 없는데 어떻게 자랄까요? 그것은 새벽마다 내리는 이슬로 자랍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비가 안 오는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슬이 내리지 않는 때는 없습니다. 이슬은 항상 내립니다. 사람들은 물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슬을 먹고 삽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슬은 같은 은혜로 날마다 먹이십니다. 하나님의 이슬 은혜는 내리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십니다. 그런데 만나가 아침에 이슬이 내일 때 내렸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슬 같은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슬 같은 양식을 먹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을 이슬 양식으로 먹이십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달려오십니까? 또 하나님 자신을 집으로 주시고 이슬을 먹이십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여수룬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유언입니다. 또 창세기부터 시작된 오경의 마지막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시입니다.
맨 마지막 말씀은 여수룬입니다. 26절에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수룬은 ‘올바른 사람, 정직한 사람, 곧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여수룬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수룬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의로운 자가 된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의롭게 인정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여수룬이라는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비스가산에서 하고 있습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너희들은 여수룬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또 우리는 영적 여수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정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수룬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올곧은 사람! 정직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여수룬으로 사세요.
그런데 여수룬은 시나 노래에서만 사용하는 말입니다. 여수룬과 이스라엘은 똑같은 말입니다.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수룬이여!’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이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수룬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사랑이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옷 입은 백성이여!’라는 말로 번역을 하고 싶습니다.
모세가 여수룬이라는 말을 사용한 때는 광야 40년의 불시험을 모두 마친 후입니다. 모진 고통을 다 겪은 후에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모든 순간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여수룬임을 기억하세요. 아플 때, 슬플 때, 고통스러울 때, 괴로울 때, 두려울 때 삶의 모든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여수룬임을 기억하세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결코 어느 순간에도 손에서 하나님을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을 꼭 붙드세요.
19세기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1861-1930)는 세 가지 서러운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난은 서러운 것이다. 불치병은 더 서러운 것이다. 지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러운 것이다.’ 첫째가 가난입니다. 가난은 서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둘째가 불치병입니다. 불치병도 서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셋째 지옥에 비하면 가난과 불치병은 아무 것도 압니다. 여러분! 다른 것을 다 놓쳐도 천국을 놓치면 안됩니다. 다른 것은 다 놓쳐도 하나님을 놓치면 안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붙드세요.
2차 세계대전 중에 히틀러가 폴란드에 만든 유대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서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아주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어느 날 나치가 많은 유대인들을 모아놓고 장대에 한 소녀를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부정하는 한 유대인이 자기 옆에 있는 랍비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자 랍비는 그 소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저기에(He is There!)”
여러분! 랍비의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랍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으로 몸부림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참는 것처럼 하나님도 고통을 참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강도가 조롱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내가 믿겠노라고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 때 우리 하나님은 그 때 십자가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계셨습니다.
심리학에서 사람들이 고통이 올 때 대처하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셋째가 이타주의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가 승화입니다. 고통에는 분명히 뜻이 있다는 태도입니다. 고통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첫째가 유머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성경적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의 하나님의 여수룬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여수룬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여수룬이라고 부르시는 그 부름에 맞게 살아갑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여수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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