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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내 삶에 영원히 기억될 싸인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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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2:1~11
주일오전예배 | 2017-11-2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구약 성경 히브리어로 포도즙은 미쉬라 에나브입니다. 포도주는 야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포도즙과 포도주에 관한 단어가 다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포도즙과 포도주를 지칭하는 단어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발효된 포도주와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모두 오이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가 포도주이냐? 아니면 포도즙이냐?’하는 논란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그 논란의 대상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본문에서 포도주를 술이라고 하는 이유는 10절에 나오는 취하다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 취하다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메쒸스코)는 술을 마셨거나 술에 취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순히 잘 마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 하나만 가지고 본문에 나오는 포도주를 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포도주가 술 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고대에는 포도즙이 발효되는 것을 막는 완전한 밀폐 기술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1세기) 유대인들은 포도즙을 완전히 끓여서 젤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항아리 넣고 공기가 완전히 제거되도록 압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리브기름을 발라두면 공기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 술이 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 압축한 포도 젤리에 물을 섞어 마셨습니다. 물이 귀했던 시대에 유대인들은 포도즙을 물 대용으로 마셨습니다.  

당시 결혼 정년기는 12-3세이었습니다. 열 두세 살의 어린 신랑 신부 친구들에게 포도주를 주었다면 결혼식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큰 혼란이 생겼을 것입니다.  

무엇 보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생활 습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정결규례를 아주 중요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도주를 가능한 피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정결 규례에 따라 씻는 물을 6개나 집에 놓아두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에 의하면 성경의 포도주는 포도즙에 더 가깝습니다. 설령 술이라고 해도 오늘날처럼 자극적이고 흥분시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적 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요단 강 세례 후 예수님은 40일 금식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참석했습니다. 이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11절에 이 기적을 첫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에서 첫 표적을 혼인잔치 집에서 행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특별한 의도가 있습니다.

 

1. 포도주가 떨어질 때  

잔치 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대 속담에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고 했습니다. 또 성경 시편10415절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104:15)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과 포도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게다가 혼인잔치의 상징은 기쁨입니다. 기쁨의 잔치에서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는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음식입니다. 유대 사회의 포도주는 옛날 우리나라 잔치에서 고기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잔치에 가면 꼭 나오는 메뉴가 고기입니다. 못 사는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잔치 때만이라도 고기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고기가 꼭 나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좋은 일이 있으면 어른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돼지 한 마리 잡아야겠는데돼지를 잡는다는 말은 잔치를 한다는 말입니다. 잔치 오신 손님들에게 고기를 주지 않는 것은 큰 결례이었습니다. 고기가 없는 잔치는 잔치를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잔치가 끝나고 두고두고 인심 야박하다고 핀잔을 듣습니다. 가난 했던 시절에 고기는 잔칫집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고기는 잔칫집에 빠지면 안되는 음식이었습니다.  

2002년 여름에 전라남도 해남에 어떤 분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예배 후에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으로 삭힌 홍어가 나왔습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보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오리지널 홍어입니다. 냄새가 보통이 아니에요. 처음인데 맛있더라고요. 상주가 장례를 치루기 위해 50만 원짜리 홍어 6마리를 사왔다고 해요. 가격에 깜짝 놀랐습니다. 해남에서는 잔치할 때 홍어가 빠지면 잔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잔치에는 반드시 홍어가 있어야 합니다. 전라남도 해남의 풍습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포도주는 바로 우리나라의 잔치에서 고기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의미가 더 큰 듯합니다. 혼인 잔치는 가장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그 풍요로움의 절정은 포도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잔치 중에 포도주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혼인 잔치의 흥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잔치가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혼주가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먼 길을 온 손님들에게 여간 실례가 아닙니다. 또 혼주에게 아주 큰 망신입니다. 두고두고 손가락질 받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일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수 없이 많은 결핍을 누립니다. 살면서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참 부족한 것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그 결핍이 대체가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택시가 없으면 버스를 타면 됩니다. 버스도 없으면 전철을 타면 됩니다. 물이 없으면 음료수를 마시면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을 쓰면 됩니다. 저것이 없으면 이것을 쓰면 됩니다. 또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그냥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불편하지 않아요.  

그런데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결핍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고대 유대에 혼인집의 포도주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다른 음식은 부족하면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주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포도주이어야 합니다. 포도주는 혼인잔치의 상징입니다.  

사람마다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지만 내게 이것만은 꼭 있어야 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꼭 해결하고 싶은 일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쉽게 해결이 안됩니다. 내 인생에 기쁨의 포도즙을 빼앗아 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념하고 살아야 할까요? 잊고 살아야 할까요? 돌아서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포기해야 할까요? 그 때 우리는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포도즙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로 가면  

혼인잔치 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매우 냉담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을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난 모르겠습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은 이렇게 하시고 마리아 부탁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 참 이상하시죠?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여자여!”라는 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문화적 정서에서 여자여라는 호칭은 상대를 좀 낮추거나 핀잔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말들입니다. “이 여자야!”, “이 여자가!” 제가 전에 사역했던 교회에서 일입니다. 송구영신예배시간에 교역자 부부가 나와서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 때 제 아내를 이 여자가 제 아내입니다.”라고 소개했다가 성도님들에게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적 정서에서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우리와 느끼는 어감이 좀 달랐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정서에 의하면 남자가 여자를 얼마든지 여자여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계층의 어떤 관계에 있든지 간에 여성을 지칭하는데 쓰였습니다. 때로는 큰 존경과 사랑을 담은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의 귀신들인 딸을 고쳐달라고 하며 소리칩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시며 거절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 옳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를 먹습니다.”(15:27)라고 답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15:28)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여자여!”라고 부르십니다. 여기 여자라는 말에는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해 인생의 포도주가 떨어진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무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다가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20:15) 여기서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십니다. 여기 여자여!”라는 말에는 우는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온정이 담겨있습니다.  

그래도 의문점은 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어떻게 요청했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입니다. 아마 이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들 예수야! 여기 포도주가 떨어졌다. 어떻게 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니?”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평상시 이런 요청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30년의 사적 생애를 마치시고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공적 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신 것이지 마리아의 아들로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여!”라는 말에는 깊은 애정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19:26)  

틀림없이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호칭이 잘 못 되었습니다. 태도도 잘 못되었습니다. 요청도 잘 못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예수님을 부르시는 자들에게 결코 냉담하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가 잘 못된 관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은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깊은 애정과 사랑을 갖고 그것을 새롭게 교정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 속에서 여러 가지 결핍을 경험했을 때 어떤 모양으로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싸매시고 고쳐주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넓은 가슴을 갖고 계십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예수님은 반응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대로 하면 나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나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시고 물로 최상의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말씀은 No인데 행동은 Yes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와 비슷한 상황을 예수님의 시험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40일 금식하시고 주리셨습니다. 그때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서 드십시오.” 예수님은 No라고 답하십니다. 그런데 벳새다 광야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십니다. 돌로 떡 만드시는 것 보다 오병이어로 5천 먹이시는 것은 더 큰 사건입니다. 도대체 언제는 안하시고 언제는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보세요. 사탄이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뛰어내리십시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당신을 받으실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No라고 답하십니다. 이렇게 해 놓으시고 예수님은 한 밤 중에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부활하셨을 때는 벽을 통과해서 오십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물 위를 걷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언제는 안하시고 언제는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No라고 대답 했는데 실제로는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개인적인 명예나 영광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고 할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의 만족이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적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돌로 떡이 되게 해보세요. 한번 성전 꼭대기에서 날아 보세요. 일약 스타가 됩니다. 마리아가 요청했을 때 ! 그래요. 어머니 제가 해결해드리지요. 물 떠오세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보세요. 잔칫집 손님들이 많기 때문에 거기서 바로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이 대답은 여자여! 지금 나에 대한 요청이 잘 못 됐습니다. 나는 잔칫집에 포도주나 채워주러 온 당신의 장남이 아닙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 책망에 대해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지적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이렇게 명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마리아는 주님의 질책을 온유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주님께는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행할 권리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일이 막힐 때, 안될 때, 어떻게 해야 모를 때 그리고 인생의 포도주를 빼앗아가는 일이 생길 때 주님께 맡깁시다.

 

3. 영원히 기억될 싸인을 주십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물을 보며 포도주로 변하라고 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마술사처럼 주문을 외시지도 않았습니다. 모세처럼 지팡이로 항아리를 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잔치 책임자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잔치 책임자가 그것을 먹어보고 신랑을 불러 칭찬을 했습니다. 성경은 이 포도주의 출처를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자들입니다. 11절에 오늘 사건을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행하신 첫 번째 이적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것을 첫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싸인(sign)으로 되어 있습니다. 싸인이 무엇인지 아시죠?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어떤 큰 행사에 가면 방명록이 있습니다. 방문했다는 표시로 싸인을 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방명록에 사업의 번창을 기원합니다.” 결혼할 때는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식으로 씁니다. 그리고 그 옆에 어디 어디 소속 아무개라고 씁니다.  

싸인은 내가 거기 갔다 왔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방문을 했어도 싸인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방문한 것이 특별한 의미가 없을 때 싸인하지 않습니다. 또 싸인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싸인을 남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칫집 방명록에 자신의 싸인을 남기셨습니다. 서명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싸인 내용은 <물이 변하여 최고의 포도주가 됨>입니다. 싸인의 내용은 <손을 닦는 물 같은 인생이 최고의 의미가 됨>입니다. 그러면 왜 싸인을 남기셨을까요? 바로 그 자리에 주님께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 싸인을 알아본 자들입니다. 그 집의 하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표적의 결론이 그래서 제자들이 믿었다는 말로 마쳐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라는 혼인 잔치의 방명록에 싸인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으실까요? 아니 반드시 남기셔야 해요. 만약 남기지 않는다면 내 인생의 혼인잔치는 그냥 밍밍한 물로 끝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싸인을 남기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남의 손이나 닦아주는 항아리의 물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잖아요. 내 인생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싸인을 남기지 않으면 내 인생에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아무 맛도 없는 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인생의 방명록에 싸인해주세요. 서명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서명 내용은 <내 기도 제목,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단 꼭 오셔야 합니다.  

저는 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등대교회 성도들 인생에 방문해 주세요. 그리고 싸인해주세요. 서명자는 <전능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서명 내용은 각 가정에 <주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단 꼭 싸인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 등대교회 방명록에 싸인해주세요. 서명자는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서명 내용은 <제 기도 제목 + 알파, 그리고 주님의 계획대로 알아서 해주세요.>  

사도 요한은 포도주 기적을 첫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첫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첫 번째 행하신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항상 첫 번이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첫 열매, 첫 월급, 첫 직장, 첫 출근, 첫 사랑 등등 뭐든지 처음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세 번째는 잊어버려도 첫 번째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표적이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주 표적을 가장만 기억합니다. 왜요! 첫 번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애에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가나 혼인 잔치에 첫 번째 오셨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주님께서 오셨다 가신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왜 예수님은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을 첫 번째 표적으로 선택하셨을까요? 혼인집의 상징은 기쁨입니다. 그 기쁨의 절정이 포도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첫 번째 표적을 혼인잔치의 포도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잃어버린 포도주,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인생의 포도주의 결핍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초대하세요. 예수님께로 가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세요. “내 삶에 영원히 기억될 싸인을 주옵소서!”, “주님! 내 인생에 방명록에 싸인해주세요. 내 인생의 한 페이지에 주님의 오심의 흔적을 남겨주세요.”  

사도 바울은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6:17)  

예수님의 방문 흔적을 가지고 사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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