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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BC460 ~ BC370 년 경)라는 고대 그리스 의사가 만든 의사들의 윤리 강령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문>(Hippocratic oath)이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이후 의대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술의 길로 갑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대 졸업식에서 메인 행사입니다. 의대 졸업생들은 오른 손을 들고 이렇게 선서합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의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류,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至上)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있습니다. 또 의사들이 소유해야 할 진한 인류애가 있습니다.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대로 의술을 집행한다면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썼습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바울은 누가를 ‘사랑을 받는 의사’(골4:14)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볼 때 누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을 실현한 의사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누가는 자신의 의술로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죽을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자 온갖 억측과 루머도 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바울에 대한 온갖 루머와 옥에 갇힘을 개의치 않고 끝까지 바울 곁을 지켰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혔을 때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4:11)고 했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의 진한 인간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는 이런 진한 인간애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깊은 인류애를 가지신 예수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는 많이 등장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탕자의 비유, 삭개오 스토리입니다. 또 예수님의 출생과 연관된 소외된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1:7), 선한 여인 마리아(1:45), 늙은 예언자 안나(2:36), 사렙다 과부(4:26), 나인성 과부(7:1), 마리아와 마르다(10:35), 예루살렘 성에서 우는 여인들(21:27)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만 나옵니다.
누가는 예수님은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깊은 인류애를 가지신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깊은 휴머니티를 가졌던 의사인 누가가 만난 지극히 인간적이신 예수님입니다. 누가가 만난 약자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여러분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중에’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세상 가운데’ 또는 ‘인류 역사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이루어진 사실’은 ‘철저하게 성취된 사건’ 또는 ‘완전히 납득될 만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말은 세계 역사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을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존 라일(Bishop, 1816,5,10-1900.6.10.)은 이 부분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확실한 사건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그리고 다시 오심 이 다섯 가지 사건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사건은 세계 역사 가운데 일어난 가장 완전히 납득될 만한 사실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고 있던 중이라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게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분이 대뜸 “돈 아니에요?”라는 거예요. 순간 제가 당황했습니다. 제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분이 굉장히 신앙이 있는 분이었거든요. 저는 신앙적이거나 아니면 철학적인 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거예요.
인터넷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검색창에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엇인지 검색했습니다. 그랬더니 비슷한 대답들이 올라왔습니다. 어떤 분은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힘과 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가장 확실하게 생각하는 것은 힘과 돈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정답을 말했습니다.
인도의 전설적인 현자로 불리는 바샤하(Vyasa, BC 4-5세기 경)의 『바가바드기타』라는 책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신의 대답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 바사햐는 죽음에 대해 이런 글을 남깁니다.
“필멸(必滅)의 운명을 타고난 모든 존재에게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죽음은 탄생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북극성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는 것 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종교는 죽음을 가장 확실한 이치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힘과 돈을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종교는 죽음을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힘과 돈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죽음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은 힘과 돈 보다 더 확실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죽음 보다 더 분명한 사건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사건을 붙잡아야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건을 우리 중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방인입니다. 수리아 안디옥 사람입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누가는 이스라엘 땅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사건을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단 한 번도 예수님의 구속 사건이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하고 목사가 됐지만 단 한 번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우리 중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2,000년 전에 내가 사는 이곳에서 수 천 킬로 떨어진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난 사건을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내가 믿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리스도 사건은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중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운데 있는 은혜입니다. 저기 이스라엘 땅에 있는 은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 교회, 내 집, 내 직장 가운데 있는 은혜입니다. 남의 은혜가 아닙니다. 내 은혜입니다. 남의 예수가 아닙니다. 나의 예수입니다. 남의 구원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건이 아닙니다. 나의 사건입니다. 복음은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입니다.
2. 붓을 든 사람들
누가는 자신이 가진 복음의 말씀을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준 그대로’라고 했습니다.
<2절>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은 12사도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전하여 준’이라는 말은 넘겨주다(παραδίδωμι, 넘겨주다 위임하다 허락하다 맡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복음을 넘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복음을 누가를 포함한 복음의 2-3세대들에게 그대로 넘겨주었습니다.
‘그대로’라는 말은 ‘~와 똑같이’(καθώς)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그대로 누가에게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하는 사람에 의해 조금도 변형되거나 왜곡되지 않았습니다. 또 인간의 말이 첨가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그대로 누가에게 왔습니다.
누가는 자신에게 전해진 복음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습니다. 자세히 미루어 살피다는 말이 아주 바싹 붙어서 쫓아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바싹 붙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가세요. 멀리 떨어지지 마세요. 바짝 붙으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계세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부터 자세히 살피세요. ‘근원부터’(ἄνωθεν)라는 말은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여기 ‘위로부터’라는 말이 ‘근원부터’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살펴야 합니다. 아래서부터 살피면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아래부터 살핀 예수님은 학교 도덕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4대 성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위로부터 살피면 예수님이 인류의 참된 구원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위로부터 살핀다는 말은 성경을 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위에서 오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쓰여진 책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모두 위로부터 아버지께로 옵니다.
<야고보서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위로부터 내려온 복음을 위해 붓을 들었습니다.
<2절>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붓을 들었다는 말은 헬라어(에피케이레오)로 ‘손을 대다’, ‘착수하다’, ‘시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붓을 들었습니다. 누가도 복음을 위해 붓을 들었습니다.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줄 알았다는 ‘말이 좋게 보였다’ 또는 ‘좋게 생각하다’는 뜻입니다(δοκέω, ①생각하다 상상하다 믿다 ②보인다). 의사이었던 누가의 눈에 붓을 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게 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눈에 복음이 좋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좋게 봐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복음을 좋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좋게 봐야 합니다. 우리가 목사를 좋게 봐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를 좋게 봐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목사와 성도를 좋게 봅니다.
2주 전에 어떤 교회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자기가 일하는 곳에 어떤 분이 왔는데 교회를 쉼 없이 욕하더래요. 너무 듣기 싫더래요. 막 짜증이 나더래요. 저한테 말하면서 얼굴을 찡그리시는 거예요. 식당에 가면 교회 욕하지 마세요. 목사 욕하지 마세요. 제발 성도 욕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다 듣고 있다고요. 사람들이 욕하는 그 사람을 욕하는 거예요. 목사와 교우를 욕하는 것은 누워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교회잖아요. 우리는 한 형제자매잖아요. 우리는 복음을 좋게 봐야 합니다. 그리고 좋게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도 복음을 좋게 봅니다.
의사인 누가는 복음을 위해 붓을 들었습니다. 의사이었던 누가는 의대 졸업식에서 손을 들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습니다. 손에 수술용 도구를 들고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누가는 손에 들었던 의술용 도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습니다. 이제 누가는 영혼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손에는 영혼의 수술기구인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누가처럼 복음을 위해 손을 듭시다.
1999년 미국 덴버의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두 명의 학생이 자신들을 왕따로 만든 친구를 향해 잔인하게 복수한 사건이었습니다. 학생 12명과 교사 그리고 총을 쏜 학생 2명이 함께 죽었습니다. 범인 가운데 한 학생이 여학생 캐시 버넬(Cassie Bernall)에게 총을 겨누고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그 순간 “믿지 않아”라고 말하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캐시 버넬은 “그래, 나는 믿어!”(Yes, I believe in God)라고 대답했습니다. 범인은 총을 더 가까이 겨누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없어!”
“아냐 있어! 너도 믿어야 돼!”
그 순간 캐시는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의 크리스천 십대들이 ‘캐시 버넬’ 티셔츠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셔츠에는 “그래, 믿어(Yes, I believe in God)”라는 캐시 버넬의 고백이 적혔습니다. 그 티셔츠를 입고 학생들이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언론들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캐시가 미국 교회에 불을 질렀다.” 캐시 버넬은 총 앞에서 복음을 위해 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손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는 수술용 메스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오른손을 들고 영혼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합니다. 이제 누가는 영혼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3.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누가가 붓을 들어 편지를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주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4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가 붓을 든 이유는 데오빌로의 신앙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데오(Θεος)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빌로(φιλος)는 ‘가까이 지내는 사이, 친구,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친구’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각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티스토스입니다. 크라티스토스는 ‘가장 숭고한, 지존하신, 존귀한’이라는 뜻입니다. 데오빌로는 도미티안 황제의 사촌인 클레멘스로 추정합니다. 복음의 자유가 없을 때 클레멘스의 신원의 안전을 위해 상징적인 이름을 쓴 것 같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받는 상대방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데오빌로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누가가 오늘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누가복음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데오빌로 각하입니다.
‘알고 있는 바’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배운 바’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헬라어로 카테케오(κατηχέω)입니다. 카테케오는 ‘교훈하다’ 또는 ‘말로 가르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데오빌로라는 예수님을 귀로 들어서 배운 사람입니다.
확실하게 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스팔레이아입니다. 아스팔레이아의 뜻은 ‘굳건함, 확실함’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날의 아스팔트라는 말이 왔습니다. 아스팔트는 가열하면 부드러워집니다. 고온에서 풀처럼 끈적끈적합니다. 결합제나 접착제와 같습니다. 그리고 온도가 내려가면 아주 단단해집니다. 또 충격을 받으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강한 탄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을 써서 보내는 것은 들어서 배운 바를 아스팔트처럼 견고하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충격을 받아도 원래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신앙의 탄성을 갖게 합니다.
틀림없이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듣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아스팔트처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읽어야 합니다.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장문의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는 다시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합하면 신약성경의 1/4이 됩니다. 누가는 한 영혼을 위해 장문의 편지를 씁니다. 누가는 지난 날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의사였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처럼 인류애를 가지고 환자를 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영혼을 치료하는 영적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누가는 영혼의 히포크라테슨 선서자이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죠지 뮬러는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날 뮬러는 시편 68편 5절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니라”라는 말씀을 읽고 영혼이 흔들리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길가에 버려진 고아를 돌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주를 위하여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66년 동안 일만 명이 넘는 고아를 먹이고 가르쳤습니다. 66년 동안 버려진 고아들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나는 평생 동안 성경을 200번 읽었습니다. 단 한 번도 싫증을 느낀 적이 없지요. 내가 성경을 읽지 않았던 3년은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인 활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일의 힘은 성경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힘입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활력소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신앙을 아스팔트처럼 단단하게 합니다. 죠지 뮬러는 자신이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성경의 약속을 신뢰하여 5만 번의 응답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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