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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아낫의 아들 삼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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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3:31
주일오전예배 | 2017-10-2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삼갈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스토리는 아주 짧습니다. 하지만 아주 흥미롭습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삼갈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삼갈은 어떤 인물이길래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물리쳤을까요? 엄청난 괴력을 가진 인물 같은데 성경은 삼갈을 아낫의 아들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과 사사기 5:6절 외에는 성경 어디에도 삼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삼갈은 어떤 사람일까요?

 

1. 삼갈의 부모는 누구?  

먼저 삼갈의 부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낫은 누구일까요? 삼갈의 아버지일까요? 아니면 어머니일까요? 아낫은 삼갈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아낫은 가나안 땅의 여신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비너스(Venus)라는 여신이 있습니다. 로마 신화에는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이 등장합니다. 고대 에트루리아(Etruria, 이탈리야 중부에 있던 나라) 신화에는 투란(Turan)이란 여신이 있습니다. 비너스, 아프로디테, 투란은 모두 미를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고대 신화를 보면 항상 미의 여신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고대 설화에도 처녀 귀신이 있습니다. 고대 가나안 땅에는 많은 우상신이 있었습니다. 아낫은 가나안 땅의 미의 여신입니다. 아낫은 가나안 땅에 비너스입니다.  

그런데 왜 삼갈을 가리켜 성경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삼갈의 부모가 아낫이라는 여신에게 매우 심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들을 아낫에게 바친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이 그 지방에서 얼마나 유명했던지 사람들은 삼갈을 아낫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성경도 삼갈을 아낫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교의 영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불교식 지명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산은 불교식 이름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불교 경전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금강산의 봉우리나 명승지도 모두 불교식 이름입니다. 관음봉, 법기봉, 석가봉, 불정대, 극락문, 지옥문 등등 모두 불교식 이름입니다. 금강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불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금강산은 불국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삶에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 싶어 합니다. 김성령이라는 연예인이 있습니다. 동생은 김성경입니다. 틀림없이 부모님이 기독교인일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의 첫째 아이의 이름이 예별입니다. 예별, ‘예수님의 별이라는 뜻입니다. 수아 한나 이삭 요셉 바울 요한 요나 등등 신앙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성경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에는 부모의 신앙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의 이름을 지어도 신앙적으로 짓습니다. 신원에벤에셀, 성신양회, 솔로몬 저축은행. 또 가게 이름을 지어도 성경적으로 짓고 싶어 합니다. 에스더 숙녀복, 술람미 화장품, 만나식당. 서울 어떤 곳에 있는 건물은 기도하는 손 모양입니다. 건물주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는 자식이 셋 있는데 이름이 전부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야.”, “너는 아빠 딸이지만 먼저 하나님의 딸이야!” 신앙인들은 자신의 삶에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삶 속에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 속에서 믿음을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삼갈의 부모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상의 종교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삼갈이라고 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인데 이스라엘 백성처럼 산 것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완전히 세속화 되었습니다. 세속 종교에 깊이 빠졌습니다. 삼갈의 부모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아주 깊이 세속화 된 사람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상의 아들로 불리어 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우상에 대해 신앙고백을 하며 살았습니다.  

종종 우리는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머리를 깎고 승려된 것을 봅니다. 5월 석가탄신일에 맞춰 다큐로 특별방송을 하기도 합니다. 얼굴이 하얀 사람들이 승복을 입고 두 손을 모으고 참선을 합니다. 불상 앞에서 절을 합니다. 그런데 이름을 보면 요셉 다윗 야곱 아브라함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중국 인도 네팔 태국 등 동양에 와서 그 나라의 토속신앙에 빠집니다.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상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상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상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사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며 사세요. 우리의 삶에 우상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2.그러면 삼갈은 누구?  

삼갈의 부모가 우상 종교에 심취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삼갈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삼갈은 부모의 우상 숭배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삼갈이라는 말은 "시미케 신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누가 지었을까요? 부모가 짓던지 아니면 우상 신전의 제사장이 지었을 것입니다. 물론 제3자가 지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을 볼 때 삼갈의 부모는 삼갈을 낳기 전부터 우상 종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길 때 임신이 되었고 우상을 섬기는 중에 태어났습니다.  

아낫의 아들”, “시미케 신이 주셨다는 말을 볼 때 삼갈은 우상 신전에 바쳐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름에 따라다니는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삼갈은 태어나기 전부터 우상 숭배와 깊이 연관된 사람이었습니다. 자란 후에 회심하고 직접적으로 우상 숭배는 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그 부모 신앙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를 어떤 신학자는 샤머니즘적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유교적 기독교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샤머니즘이나 유교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유교적으로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샤머니즘식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 신앙을 성경에 비추며 신앙을 점검해 보세요. 우리는 우상 종교 아래 있던 사람들입니다.  

둘째, 삼갈은 정식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를 가졌습니다. 이 말은 삼갈이 농부라는 말입니다. 팔레스틴이나 수리아 지방에서는 막대기로 소를 찌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면 밭을 갈았습니다. 길이는 약 2.4~3m 정도 됩니다. 양쪽에 쇠가 달려 있습니다. 한쪽 끝은 대못처럼 뾰족합니다. 다른 한쪽은 끌처럼 넓적합니다. 둥글고 두꺼운 막대기입니다. 소모는 막대기는 쟁기에 흙을 떼거나 외양간 청소할 때 사용했습니다. 또 적군과 싸울 때 창처럼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삼갈은 농부이었습니다.  

사사라는 말은 군인지도자 또는 해방자라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사사들이 용사 출신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사사 옷니엘도 용사이었습니다. 기드온, 입다도 뛰어난 용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갈은 농부이었습니다. 농부 출신의 사사가 나쁘다거나 옳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농부가 사사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편견이지만 당시에는 사사가 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삼갈은 출신이 불분명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는 총 12명입니다. 사사들의 출신이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옷니엘은 유다지파, 에훗은 베냐민 지파, 드보라는 에브라임 출신,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라고 성경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2명의 사사들 중 11명의 사사들의 출신 지파가 명확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삼갈은 어디 출신인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이름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우상 숭배자의 아들이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갈은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삼갈이라는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입니다. 삼갈은 날 때부터 우상 숭배자의 아들이었습니다. 정식 군인이 아닙니다. 출신이 불분명합니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모릅니다. 성경 기자도 삼갈에 대해 딱 한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총 마흔 일곱 자입니다. 아주 짧습니다. 제가 삼갈에 대해 알아보려고 사사기에 대한 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책들이 삼갈에 대해 거의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마디 설명도 없이 그냥 지나친 책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삼갈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갈은 사사 시대 등대와 같은 사람입니다.  

윈도우 XP 바탕화면의 배경인 푸른 초원의 사진이 있습니다. 적어도 컴퓨터를 하시는 분들은 수백 번에서 수 천번 이상을 본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전속 사진 작가였던 찰스 오리어(Charles O' Rear 또는 Chuck O' Rear)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명은 궁극적 행복(Bliss)’입니다. 파란 언덕은 포도 산지로 유명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소노마 카운티의 한 포도 농장의 모습입니다. 찰스 오리어가 차를 타고 가다가 차를 세우고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을 눈여겨 본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이 사진을 윈도우즈XP의 바탕화면으로 채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에 하나가 됩니다. 작가 찰스 오리어는 이 사진이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은 당시는 1월로 포도 농장은 휴지기였습니다. 해충으로 인해 포도 농사가 실패하자 포도넝쿨을 다 뽑아낸 상태였다고 합니다. 참 신비합니다. 포도농장에 포도농사가 실패해 포도덩굴을 다 뽑아낸 언덕이 최고의 사진이 됩니다. 꼭 이 사진 한 장이 우리 인생과 같습니다. 환난으로 아주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일생에 놓칠 수 없는 아주 귀한 보화를 얻습니다. 다 뽑혀요. 하지만 그 속에 보화가 있어요. 사진작가들은 찍은 사진은 한 장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 속에 많은 것을 표현합니다. 의미가 클수록 사진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사진 한 장 가격이 수십억을 호가 합니다.  

삼갈은 성경에서 한 장의 사진과 같습니다. 장편의 영화가 아닙니다. 긴 대하드라마도 아닙니다. 스릴 넘치는 블록버스터도 아닙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사진과 같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삼갈이라는 사진 한 장을 찍어 사사기 초입에 걸어놓았습니다. 마치 삼갈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라는 암시처럼 말입니다. 삼갈은 사사시대 등대와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삼갈 사역 스토리는 전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의 삶이 삼갈처럼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인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장의 의미 있는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삼갈처럼 우리 시대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암흑의 시대에 삼갈 스토리는 전설이었습니다. 그리고 등대이었습니다.

 

3. 삼갈이 한 일은?  

삼갈이 한 일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삼갈은 혼자서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삼갈이 혼자 600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혼자 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삼갈이 원래부터 힘이 장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힘이 장사한 사람이 나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의 권능을 입는 것입니다. 사사들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을 때 적군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사사기 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했을 때 기드온은 일어나 미디안은 물리쳤습니다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 되었을 때 힘센 사자를 맨손으로 찢었습니다.  

<사사기 14: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염소새끼를 찢는 것 같이 젊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을 때 삼손이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사사기 15:14-15>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했을 때 삼손은 몸의 밧줄을 가볍게 끊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했을 때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물리쳤습니다.  

사사 시대 사사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일어나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했을 때 일어나 큰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했을 때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어떻게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물리쳤을까요? 틀림없이 성령에 사로잡혀, 성령의 능력으로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 시대에 소모는 막대기를 가진 평범한 농부였던 삼갈을 사용하셨을까요? 블레셋은 해양 민족입니다. 평지에 살았습니다.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도시문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먼저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블레셋은 현대화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모는 막대기를 든 삼갈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 군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촌부인 삼갈을 사용하셔서 최신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이것은 싸움의 승패는 여호와께 있다는 것입니다. 싸움의 승패는 수에 있지 않습니다. 싸움의 승패는 무기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현대화된 무기를 가졌느냐가 싸움의 승패를 좌우하지 않습니다. 싸움의 승패는 성령으로 무장했느냐 무장하지 않았느냐가 결정합니다.  

칼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가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칼도 필요하고 군대도 필요합니다. 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성령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인 공병호 씨의 공병호의 성경공부라는 책이 있습니다. 공병호 씨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대학교에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일본 나고야 대학교 객원 연구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분야에서는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이 50살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공병호 씨는 자신의 책에 한 친구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힘들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본인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량함이란 기준으로 친구를 평가하면 악인과는 거리가 아주 먼 친구입니다. 아주 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사가 제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친구가 공병호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고 합니다.  

내 대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들 대에서는 삶이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왜 이렇게 일이 잘 안풀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는 친구에게 공병호 씨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앞으로 잘 될 거다.”라는 평범한 위로였다고 합니다. 이번만 참아내면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게 되고부터는 친구의 어려움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노력하지만 사사건건 길이 막히는 친구를 볼 때면 그가 어둠의 질긴 흑암 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져온 죄의 그림자로부터 친구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세대에서도 그런 그림자를 벗어나기 힘들겠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제 친구에게 예전과 다른 이야기를 해줍니다. 친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친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병호 씨가 믿음을 갖고 친구의 문제를 보니까 이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끊임없이 생기는 문제는 실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공부를 안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배경이 좋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재수가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운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본문은 블레셋이 성경에서 최초로 이스라엘의 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블레셋을 평범한 농부를 사용하셔서 물리칩니다. 적어도 블레셋과의 관계는 실력이나 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건이 다윗과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은 키가 여섯 규핏 한 뼘입니다. 놋투구를 쓰고 비늘 갑옷을 입었습니다. 갑옷의 무게는 5천 세겔입니다. 다리에는 놋 각반을 차고 어깨에는 놋단창을 찼습니다.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 날은 철이 600세겔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물맷돌 다섯 개뿐입니다. 다윗은 싸움에 나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우리 시대는 많은 부분에 위기입니다. 좋은 칼로 무장하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무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하나님께서 삼갈을 사용하신 이유는 싸움은 칼과 무기가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싸움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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