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밧모섬에서 눈을 뜨다

조회수 : 889회

본문 : 요한게시록1:9
주일오전예배 | 2017-10-1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2008년에 개봉한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라는 포르투칼 작가의 Blindness(눈먼 사람)라는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명작입니다  

어느 날 한 일본 사람이 눈이 멉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습니다. 어떤 예비 조짐도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희한한 눈병이었습니다. 이 눈병은 거리에서 이 사람을 도와준 행인에게로 전염됩니다. 그리고 그를 치료한 안과의사에게도 옮깁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환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보호소를 만듭니다. 이상하게 의사의 아내는 남편을 가까이 하는 데도 눈이 멀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남편을 따라 보호소로 들어갑니다. 부인은 보호소 안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보호소는 무서운 혼돈 상태로 빠져듭니다.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용변을 봅니다. 그 오물 위를 짐승처럼 뒹굴며 삽니다. 아예 냄새나는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살기도 합니다. 수용소 안에서 사람들 간의 신뢰는 무너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불화가 깊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총을 든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수용소의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사람들은 왕에게 가지고 들어왔던 돈과 보석을 바쳐야 했습니다. 한 끼 밥을 얻어먹기 위해 총을 든 왕에게 여자들을 상납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어떤 도덕이나 윤리,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건강한 상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보기도 듣기도 말하기도 민망한 역겨운 일들이 수용소 안에서 일어납니다. 부인은 보호소의 비참한 상황을 보며 아주 괴로워합니다.  

부인은 왕을 죽입니다. 곧이어 누군가에 의해 수용소는 불길에 휩싸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의사의 아내를 따라 무법천지이었던 수용소를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도시 전체가 이미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라마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또 독자들에게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고 있는 눈먼 자가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볼 수는 있지만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눈을 감고 있지 않은가 묻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살던 시대에 로마는 부요하고 평화로운 나라이었습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보다 강력한 대제국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눈먼 자들의 도시였습니다. 권력, 쾌락, 물질, 보이는 세계에 사람들은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을까요?

 

1. 나는 너희 형제  

먼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형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9a)라고 했습니다. 형제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델포스입니다. 아델포스는 동일한’, ‘같은이라는 의미의 접두사 아(ά)자궁’, ‘라는 뜻의 델퓌스(δελπύς)의 합성어입니다. 형제는 한 태에서 난 혈육입니다. 이 말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라는 의미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신앙생활 하는 교우들을 한 태에서 난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태에서 탄생한 가족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이루어진 권속입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무엇보다도라는 말을 KJV모든 것 위에라고 번역했습니다. ‘뜨겁게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열심히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성경은 뜨겁게라는 말을 깊이라고 번역했습니다. KJV뜨겁게열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 때에 <모든 일 보다 먼저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너희 형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 교회에 이 뜨거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나 누구는 너희 자매요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을 살아가는 형제자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고난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이었습니다.

 

2.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  

또 사도 요한은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이었습니다. 9절 중간에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의라는 말은 예수 안에서또는 예수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믿음 때문에! 예수의 환난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환난입니다.  

나의 환란이 아닙니다. 내가 잘 못해서 당하는 환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환란입니다. 내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나의 참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참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터툴리안이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믿고 보니 내가 갖고 있는 직업이 너무 안좋은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직업을 놓치면 우리 가족은 다 굶어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러분! 이런 때 목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이런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터툴리안은 그 사람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꼭 살아야 되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렸습니다.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 있어야 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라는 말은 나는 혼자 사람들의 박해와 핍박을 피해 안일하게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너희와 함께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너희의 동지다.” 이런 말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나누는 동지’, ‘함께 환난을 당하는 동지였습니다.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함께 고난을 나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3. 밧모섬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9C)  

저는 9절을 밧모섬이라는 세 글자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있었습니다. 밧모섬은 로마 시대 중범죄자들의 유배지였습니다. 섬 겉 표면이 모두 화강암이라는 돌입니다. 지금은 2,700여명이 살고 있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돌섬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돌과 바다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섬에서 90세가 넘은 나이로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여름에는 물이 없어서 목마름과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땔나무도 없이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밧모섬은 중형 죄수들을 유배시켜 죽음을 자초하게 하는 최악의 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불모지인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납니다. 살 소망이 전혀 없는 그곳에서 오히려 최고의 소망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인류에게 영원한 소망을 안겨주는 요한계시록을 씁니다. 왜 밧모섬일까요?  

히말라야는 8,000m가 넘는 14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얼마나 높은지 이 14개의 봉우리는 하늘에게 가장 가까운 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사람은 지구 역사상 14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산에 오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이 갑니다. 20111018일 박영석 대장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다가 실종되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 고지대에는 많은 등반가들의 시신이 눈 속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8,848m의 에베레스트입니다. 1953529일 오전 1130분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라는 사람이 이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반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셰르파 텐진 노르가이라는 사람이 최초의 등반자입니다. 셰르파는 등반가가 정상을 오르기 위해 짐을 함께 지고 가든지 길을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에드먼드 힐러리는 셰르파 텐진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올랐습니다. 이 에베레스트의 마지막 관문은 정상 바로 밑 12m지점에서 시작하는 수직 빙벽입니다. 엄홍길 대장은 눈사태, 낙석, 낙빙 등 기상 변화가 극심한 이곳을 <지옥의 코스>라고 부릅니다. 이 지옥 코스에서 힐러리는 탈진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텐진은 30분 동안 힐러리 경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힐러리 경이 움직이지를 못하자 그를 생명줄로 자신의 등에 묶고 이 12m수직 빙벽을 오릅니다. 역사 개국 이래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셰르파 텐진은 에베레스트 최초 정복의 영광을 힐러리에게 돌립니다. 힐러리 경은 이 사실을 텐진 사후 13년 만에 발표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네팔 사람들은 이 12M 수직 빙벽을 <텐진의 등>이라고 부릅니다.   

8,848m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산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산입니다. 에베레스트의 마지막 관문인 수직빙벽 보다 더 지독한 빙벽이 죽음이라는 빙벽입니다. 에베레스트는 많은 사람들이 등반했지만 이 죽음의 빙벽은 아담 이후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너무 높은 산이어서 감히 누구도 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유사 이래로 그 누구도 정복한 적이 없는 죽음이라는 수직 빙벽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수직 빙벽을 자신의 등에 저와 여러분을 생명줄로 묶고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빙벽을 정복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수직빙벽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등>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입니다.  

요한은 사도로 부름을 받고 60년 이상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 사도 요한에게 마지막 고난의 빙벽이 바로 밧모섬입니다. 밧모섬은 사도 요한이 올라야 할 마지막 고난의 빙벽이었습니다. 왜 밧모섬일까요?  

성경 기록은 모세가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모세를 애굽 왕궁에 40년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광야로 40년을 보내십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불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광야 시험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 죽음의 쓴 고통을 통과한 사람, 광야의 불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쓴 책이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성경은 그냥 아무렇게나 써진 책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2) 침공 때 바벨론 그발강가 노역의 현장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포로들은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형제가 찢어졌습니다. 형은 동쪽으로 동생은 북쪽으로 끌려갔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종살이를 하다가 이름도 없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종이 되어 그발강가에서 괴로운 노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곳, 고난의 현장에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24:16)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죽었습니다. 가족과 생이별도 힘든데, 종살이도 힘든데, 거기서 하나님은 에스겔의 삶의 유일한 동반자인 아내를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그 고난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새 언약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에스겔서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결혼을 해서 호세아는 음녀와 21녀를 낳았습니다. 어느날 호세아가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없습니다. 찾아보니 음부를 따라가서 다시 음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너는 음부에게 가서 아내를 돈을 주고 사오라고 하십니다. 21녀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의 자식일까요? 이 아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호세아처럼 사랑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창기처럼 버렸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랑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소년 시절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친구들은 그곳에서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이 왕궁에 살았기 때문에 호희호식하며 살았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삶 자체가 사자 굴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기에 시기와 질투 속에 살았습니다. 삶이 가시방석이었습니다. 풀무불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의 굴 같은 곳에서 다니엘서를 기록했습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 39, 신약 27권 총 66권입니다. 장수는 구약 929, 신약 260장 총 1,189장입니다. 절수는 구약 23,131, 신약 7,942절 총31,073절입니다. 하나님은 1,500년 동안 40여명의 저자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BC 1,440년경에 모세를 통해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를 쓰셨습니다. 이제 시간은 흘러 AD 95년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기 시작한지 1,545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쓰려고 하십니다. 1,545년 동안 써내려온 대하 스토리를 이제 마치려고 합니다. 마지막 책입니다. 마지막이기에 최후의 소망, 최고의 소망을 성도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누가 좋을까요? 어디가 좋을까요? 로마, 바벨론, 왕궁, 노래방, 마트, 백화점. 어디가 좋을까요?  

하나님께서 선택한 곳이 밧모섬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12사도가 모두 순교 당했습니다. 12사도 중 유일하게 사도 요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요한은 AD 26년경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95년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승천 후 65년 동안 예수의 환난과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참음에 동참한 사도입니다. 요한은 66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가장 높은 고난의 에베레스트를 올랐습니다. 이제 마지막 12m의 수직 빙벽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마지막 관문인 밧모섬으로 요한을 보내십니다. 90이 넘은 요한을 최고의 고난의 풀무로 보내십니다.  

왜 밧모섬일까요?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 아래서는 하늘의 열린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환락의 도시에는 하늘의 열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쾌락의 도시에서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왜 밧모섬인가?  

쾌락에 눈이 먼 도시에서는 최고의 소망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내가 보니’(내가 보매)라는 말이 26번 나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렸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지구상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아름답게 우는 새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가시나무새는 죽기 직전 일생에 단 한번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웁니다. 그 새는 알에서 깨어나 둥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단 한번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시나무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가시나무를 발견하면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 가슴을 찔려 붉은 피를 흘리며 이 세상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새소리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갑니다. 이것은 먼 옛날 켈트족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한 것은 가장 처절한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최상의 것은 최고의 고통을 치르고야 살 수 있습니다. 최고의 소망은 어디서 나올까요? 최고의 고통 속에서 나옵니다. 인류 최후의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최고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최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하늘의 소망을 노래했습니다. 눈먼 자들은 최고의 소망을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눈먼 자들은 최고의 희망을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세계에 눈을 뜬 사도 요한은 최고의 소망이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기록한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닌가?’ 이 질문은 소설가가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를 향해 해야 하는 질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 자신은 눈먼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고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시대 사람들은 돈에 눈이 멀었습니다. 쾌락에 눈이 멀었습니다. 이 눈먼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뜨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최고의 소망을 바라보며 소망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우리 인생의 밧모섬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도 요한처럼 최고의 소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이전글 아낫의 아들 삼갈
다음글 끝은 시작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