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 ok!
등대교회 홈페이지입니다.

Sermon

끝은 시작을 이긴다

조회수 : 1154회

본문 : 창세기29:31~30:8
주일오전예배 | 2017-10-0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뇌신경학자인 조나 레러의 사랑을 지키는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나 레러는 이 책에서 동반자적 사랑을 언급합니다. 동반자적 사랑(심리학자 일레인 해트필드와 윌리엄 월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인생에 깊이 관련된 사람에게 느끼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부, 자식, 친한 친구, 지인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동반자적 사랑은 인간 본성의 가장 큰 미스테리라고 합니다.  

뇌 스캔 장치를 머리에 씌운 채 배우자, 친한 친구, 지인 등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뇌에서 엄마와의 애착과 관련된 뇌세포(담창구, 흑질)의 활동이 급격히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들끼리 무엇인가 서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하는 애착 시스템이 있는 것입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결혼한 부부는 매우 비슷한 면역체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인구통계학적으로 동일한 사람들보다 세포의 차이가 50%나 적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랑이 우리 몸의 구조까지 바꾼다는 연구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는 오직 그들끼리만 공유하는 생명체와 생물학의 섬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닮는 다는 말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부부가 면역체계가 비슷해진다면 내가 건강해야 아내도 건강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영적으로 건강해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우리는 동반자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생각, 믿음이 서로 건강해야 합니다. 옆에 있는 교우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부정적인 믿음, 불신, 원망, 불평이라는 세포를 전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교우의 믿음을 세워주는 영적 세포를 전파해야 합니다. 또 배우자 자녀에게 은혜로운 영적 면역 세포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나와의 연합도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주님과 깊이 연합할수록 나는 주님과 같은 면역체계를 갖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주님과 연합해서 불행했던 시작을 은혜로운 끝으로 이긴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레아입니다.

1. 시작과 끝  

야곱의 삼촌 라반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 자매는 사촌형제인 야곱의 아내가 됩니다. 당시에는 근친상간이 허락될 때이었습니다. 야곱은 레아 보다 라헬을 더 사랑합니다(29:30). 이유는 순전히 외모 때문입니다. 성경은 레아와 라헬의 외모를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29: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레아는 시력이 약하다고 했습니다. 시력이 약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코트’(원형, 라크)입니다. 라크는 부족하다’, ‘약하다’,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총기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레아는 눈에 총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 시력도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양을 쳤지만 레아는 양을 치지 않았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기 위해서는 고도의 시력이 필요했습니다. 양치기는 멀리서도 양이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레아가 양을 치지 않은 것을 보면 눈이 많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눈은 미모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성형외과 의사들은 얼굴은 코로 시작해서 눈으로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눈은 얼굴 미의 화룡정점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눈이 레아는 좋지 않았습니다. 흐릿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총기가 없어 보였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습니다. 곱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광채’, ‘우아함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할 만큼 예쁜 여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아리땁다는 말은 모양’, ‘얼굴’ ‘형태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볼 때 라헬은 얼굴 뿐 아니라 몸매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라헬은 외모가 빼어난 여성이었습니다. 곱고 아리땁다는 말이 성경에 세 번 쓰입니다. 첫 번째가 라헬, 두 번째가 에스더, 세 번째는 바벨론 나라(47:1)에 쓰입니다. 따라서 곱고 아리땁다는 말이 성경에서 사람에게는 라헬과 에스더에게만 쓰인 것입니다.  

<에스더 2: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를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고 했습니다. 에스더는 외모로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페르시아의 왕비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곱고 아리땁다는 말을 라헬에게 동일하게 쓰고 있습니다. 라헬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지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삼촌에게 7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라헬이 얼마나 예뻤는지 야곱은 7년을 수일처럼 여깁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라헬은 야곱을 독차지 합니다. 이것이 레아에게는 아주 큰 아픔이었습니다.  

어느날 레아의 큰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합니다. 르우벤은 합환채를 어머니 레아에게 드립니다. 라헬은 레아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아가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30:15)라고 말합니다. 라헬은 야곱을 아예 빼앗아 버렸습니다. 남편을 거의 독차지 했습니다. 라헬이 레아에게 합환채 대신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30:15)고 합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들에서 돌아왔습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합환채로 오늘밤 당신을 샀다고 말합니다.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30:16)  

합환채로 남편을 하룻밤만 샀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야곱이 레아와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적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처음부터 레아와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입니다. 삼촌에게 사기당한 결혼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한 정도가 아니라 야곱의 마음에는 레아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라헬은 남편을 독차지 했습니다.  

레아와 라헬 두 자매가 함께 컸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라헬은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을 것입니다. 칭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아는 동생의 그늘에 가려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혼 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남편은 동생만을 사랑했습니다.  

레아의 아픔이 여기 있습니다. 자라면서 줄 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사랑까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좋지 않아요. 과정도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도 좋지 않아요. 끝도 좋지 않을 것 같아요. 너무 서글픈 인생입니다. 이것이 레아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끝에 놀라운 반전이 생깁니다. 야곱은 죽을 때 라헬이 아니라 레아 곁으로 갑니다.  

<창세기49: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창세기49: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야곱이 후손들에게 유언하길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고 말합니다. 물론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바꾸어서 말하면 나를 레아 곁에 묻어달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을 모두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레아를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가 레아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은 죽을 때 이것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요   

성경은 인간의 로맨스가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로맨스가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로맨스입니다.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레아는 외모로 말하면 흑수저 중에 흑수저입니다. 늘 외로웠습니다. 늘 아팠습니다. 시작이 좋지 않았습니다. 과정도 아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끝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시작을 보며 달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앞을 보며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뒤를 보며 달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이 있어요. 시작이 좋지 않아서 때로 마음이 상합니다. 울적합니다. 과정이 좋이 않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시작은 신경쓸 것 없습니다. 끝은 시작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끝은 시작을 무시합니다. 끝은 시작을 이깁니다. 시작이 좋다고 으스댈 것 없고 시작이 나쁘다고 기죽을 것 없습니다. 끝은 시작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끝은 끝으로만 끝납니다. 끝이 좋아야 정말 좋은 것입니다. 시작이 나빠도 끝이 좋으면 시작이 더욱 빛납니다. 끝이 나쁘면 시작이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끝을 향해 달리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끝을 바라봅시다. 끝은 시작을 이깁니다. 라헬의 시작을 레아의 끝이 이겼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끝이 아름답습니다.  

2. 점점 하나님과 연합하는 레아   

레아의 인생의 끝이 아름다웠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레아의 인생 마지막이 인간의 시기 질투 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로맨스로 끝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레아가 하나님과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결혼 후 점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레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하나님께로 이끌립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말은 점점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레아는 하나님께 이끌리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레아가 첫째 아들을 낳습니다. 레아는 이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습니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둘째 아들을 낳습니다. 둘째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픔을 들으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레아가 셋째 아들을 낳습니다. 셋째 이름은 레위입니다. 레위는 연합’, ‘연결이라는 뜻입니다. 레위의 후손들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다리가 됩니다.  

넷째 아들을 낳습니다. 넷째 이름은 유다입니다. 유다는 찬송하다’, ‘찬양하다’, ‘감사하다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지은 이름을 보세요.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레아는 점점 하나님께 이끌리고 있습니다. 레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감사와 찬송이 되었습니다. 레아의 신앙이 점점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레아는 유다를 낳고 출산이 멈췄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 갑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느낌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은 자신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줍니다. 빌하가 첫째 아들을 낳습니다. 라헬은 그 이름을 단이라고 짓습니다. 단은 억울함을 푸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 잘난 것을 드러내셨다는 의미입니다. 교만했습니다. 빌하가 둘째를 낳았습니다. 라헬은 둘째 이름을 납달리라고 짓습니다. 납달리는 경쟁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의 마음에는 욕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빌하는 자신의 아들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주인 라헬이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레아도 자신의 종 실바를 야곱에게 줍니다. 실바가 아들을 낳습니다. 레아는 이름을 갓이라고 짓습니다. 갓은 복됨이라는 뜻입니다. 실바가 둘째 아들을 낳습니다. 레아는 둘째 이름을 아셀이라고 짓습니다. 아셀은 기쁨’, ‘행복’, ‘만족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종이 낳은 이름까지 믿음으로 짓습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워요. 실바는 자기 주인 레아의 믿음으로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레아가 다시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는 다섯째 아들을 낳고 잇사갈이라고 짓습니다. 잇사갈은 보상’, ‘이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여섯째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짓습니다. 스불론은 후한 선불’, ‘존중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영적 연합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과 연합한 레아는 영적 면역체계가 하나님의 세포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동안 인생이 너무 아팠어요. 그런데 하나님과 연합하니까 그 아픔이 다 치료되었어요. 하나님의 만능면역세포가 레아의 아픔을 완전히 치료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레아도 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레아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찬송하며 삽니다.  

반면에 라헬은 하나님과 분리돼서 살아갑니다. 철저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삽니다. 합환채(mandrake)는 꽃이 아름답고 냄새가 향기롭습니다. 특유의 강한 향으로 남녀간의 사랑을 북돋아 주는 식물입니다. 열매는 3~5월에 익습니다. 열매가 토마토 자두 모양입니다. 색깔은 청황색입니다. 뿌리는 인삼처럼 두 갈래로 사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고대 근동에 사는 여인들은 합환채를 최음제 또는 강장제로 여겼습니다. 합홥채를 먹으면 회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합환채는 사랑의 과실로 불리었습니다. 사과를 닮았다고 해서 사랑의 사과라고 하기도 합니다.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자신의 종 빌하를 야곱에게 줍니다.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둘 낳습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언니에게 합환채를 삽니다. 최음제를 써서 성적 욕구를 불러 일으켜 자녀를 낳으려고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 최음제라니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라헬은 합환채를 먹고도 3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런데 언니는 합환채를 먹지 않았는데도 아들을 둘이나 더 낳습니다. 레아가 자녀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라헬은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과 더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몸부림만 쳤습니다. 그동안 아름다운 외모로 안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되는 것이 생겼어요. 막혔어요. 그래서 인간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인간 냄새만 났어요.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주님과 연합하세요. 그러면 주님의 면역체계가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아픔이 많습니까? 별의별 일이 다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면역체계는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면역세포는 만능치료세포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면역체계로 그 아픔을 이기세요. 그래서 주님 주신 은혜를 누리며 찬송하며 사세요. 레아의 인생의 끝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과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3. 신앙은 해석  

라헬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생 문제 해석이 잘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어느 날 라헬은 남편에게 그 탓을 돌립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창세기30:1)  

라헬은 자신이 당한 괴로움이 남편 탓이라는 거예요.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잘 못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너랑 결혼해서 내가 이렇게 됐다는 거예요. 내가 죽겠노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내가 죽었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자신은 죽었다는 거예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끝났다는 것입니다. 라헬은 자신의 인생문제해석을 잘 못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남편이 아니라 자신인데 남편 탓을 하고 있습니다. 라헬은 인생문제해석을 잘 못했습니다.  

남편 탓을 하던 라헬은 후에 자식 탓을 합니다. 야곱과 레아 라헬 가족이 하란(터키)에 있는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입니다.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 우상을 훔칩니다. 라반이 자신의 우상이 없어진 것을 알고 야곱 일행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드라빔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이 때 야곱은 아주 무서운 말을 합니다.  

만약 외삼촌의 우상 신을 갖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31:32)  

야곱의 말처럼 드라빔을 훔친 라헬은 정말 얼마 있다가 죽습니다. 야곱 일행이 세겜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갈 때입니다. 가는 길에 라헬은 그렇게 기다리던 둘째 아들을 낳습니다. 산고가 얼마나 심했는지 라헬은 아들을 낳으며 베노니라고 합니다. ‘베노니라는 말은 슬픔’, ‘고통’,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나쁜 녀석’, ‘못된 녀석이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지금 너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거예요. 자식을 낳고 못된 녀석이라뇨?  

라헬이 죽은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확인도 하지 않고 저주를 선포한 자기 남편 야곱 때문이 아닐까요? 우상을 훔치고 숨긴 자신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죽어가면서 자식 탓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는 아들을 나면서 나쁜 녀석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제 태어난 아들을 저주하고 있어요. 라헬은 인생문제해석을 잘 못했습니다.  

반면에 레아는 인생을 믿음으로 해석했습니다. 레아는 첫째 아들 르우벤을 낳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29:32)라고 고백합니다.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말의 히브리 문자적인 의미는 괴로움을 아셨다입니다. 레아는 하나님이 자신의 괴로움을 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신음과 기도를 듣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이름을 들으심(시므온)이라고 짓습니다. 레아는 시시때때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아들 이름으로 남깁니다. 레아는 인생을 바르게 해석했습니다.  

한국웃음연구소 소장 이요셉씨가 어느 날 자신의 멘토와 식사를 하게 됐답니다. 이요셉씨의 멘토는 우리 나라 산업 교육 방면으로 45년을 활동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80이 넘으신 분입니다. 지금도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신답니다. 그 멘토라는 분이 식사 중에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요셉 씨, 내가 45년 동안 심리와 교육을 연구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네.”

그게 뭡니까?”

그건 바로 인생을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았네.”

인생은 해석이라네.”  

여러분! 인생은 해석입니다. 인생이 해석이라는 말은 인생의 문제를 좀 더 좋은 방향에서 볼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해석하는데 나는 다르게 해석하는 힘입니다. 그것도 믿음으로 해석하는 힘입니다. 모두가 저주라고 생각할 때 나는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신앙은 해석입니다.  

레아는 인생의 순간마다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해석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요셉씨의 멘토는 45년을 산업과 교육에 활동해서 얻은 것이 인생은 해석이라는 한 마디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순간순간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한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레아가 가졌던 인생 해석의 지혜입니다. 우리에게도 레아의 인생해석의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강준민 목사님의 위기를 극복하는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겪는 큰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큰 문제가 큰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큰 문제를 만난다는 것은 큰 꿈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꿈의 크기가 문제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큰 문제를 만난다는 것은 큰 책임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책임의 크기가 문제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시작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정에서도 큰 문제가 첩첩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도 레아처럼 해석의 지혜를 발휘합시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끝은 시작을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끝이 하나님의 은혜의 로맨스로 마무리 되게 합시다. 끝은 시작을 잊게 합니다. 끝은 시작을 이깁니다.  

매튜 헨리 목사님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라는 책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은 최고의 날이 될 것이고, 마지막 일은 최고의 일이 될 것이며 마지막 위안은 가장 달콤한 위한이 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며 선지자의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12:6)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끝을 향해 믿음으로 달려갑시다. 끝은 시작을 이깁니다.

이전글 밧모섬에서 눈을 뜨다
다음글 예수님의 길 사탄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