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예수님의 길 사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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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4:3-4
주일오전예배 | 2017-10-0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늙어서 자연사한 것도 아니고 병들어 죽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타살 당했다. 하나님을 죽인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니체가 그리스도인들을 비꼬아서 한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주님의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과 3-4년까지만 해도 저 자신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회개를 많이 합니다. 이유는 목사만 제대로 서면 교회는 부흥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때입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 하나가 목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부흥의 걸림돌이구나! 목사가 예수님의 길을 막고 있구나!’ 그래서 회개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혹시 예수님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믿는 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막지 마시길 바랍니다.  

니체는 끝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주시오.” 여러분!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사탄은 가까이에 있다  

사탄을 시험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유혹(πειρζω)입니다. 유혹의 목적은 사람을 죄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모두 마귀의 종입니다. 사탄의 유혹 뒤에는 아주 사악한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탄의 유혹을 사냥꾼이 숲에 쳐 놓은 올무에 비유했습니다(딤전3:7). 산에 가면 사냥꾼들이 쳐 놓은 덫이 있습니다. 덫에 걸린 짐승들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서서히 죽어갑니다. 사탄은 유혹하는 자입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나아와서라는 말이 헬라어로 프로세르코마이(προσερχομαι)입니다. 프로세르코마이는 앞을 향하여라는 뜻의 접두어 프로스(προς)오다, 가다, 들어가다, 지나가다는 뜻의 동사 에르코마이(ερχομαι)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프로세르코마이는 ‘~에게 오다, 접근하다, 가까이 오다, 다가가다등의 뜻입니다. 아주 정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향방 없이 무조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유혹할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나아갑니다. 사탄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압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나아와서라는 말은 거리상 아주 가까이 접근한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사탄은 소설이 아닙니다. 사탄은 만화가 아닙니다. 사탄은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은 현실입니다. 사탄은 실재입니다. 마귀는 마치 사람처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2000년 전 마귀가 예수님께 다가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다가옵니다.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구자원 목사님의 대적을 바로 알자라는 책에 악한 영을 한국 사람들은 <조상귀신>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가족간의 영>(familial spirits) 또는 <친숙한 영>(familiar spirits)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아주 일리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신접한 자’(19:31, 삼상28:3, 8:19)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접은 접신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오브입니다. 오브는 친숙한 영들’, ‘친숙한 영을 가진 사람’, ‘친숙한 영을 불러 오는 행위’, ‘친숙한 영을 불러 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무당입니다. 그래서 KJV신접한 자친숙한 영을 가진 사람’(them that have familiar spirits)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악한 영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까이에 접근해 있는지 가르쳐 주는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악한 영이 가까이 있는 것을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조상귀신, 집신, 마당신, 방신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적어도 조상귀신 집신 다락신이라고 부를 만큼 악한 영이 가까이에 있음을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악한 영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삽니다. 사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실재입니다. 우리 아주 가까이 접촉해 있습니다. 성경이 <친숙한 영>이라고 부를 만큼 악한 영은 우리 실생활에 깊이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처럼 예수님께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마귀는 가까이 접근해 있습니다.  

1960-70년대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영적이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영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지나친 영의 강조가 있었습니다. 웬만한 일은 귀신 마귀 사탄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거부감 있었습니다.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이런 풍조가 198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부터는 교회가 합리적이 되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곳이지만 상식이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합리주의가 교회의 영적인 부분을 해쳤습니다. 무서운 것은 합리주의가 성경의 탈을 썼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직 성경’, ‘오직 말씀을 외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회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근원적인 모토입니다. 그런데 오직 성경을 외치는 사람들이 판단은 성경이 아니라 자기 이성으로 판단합니다. 성경보다 이성이 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것은 영적 전투입니다.  

1970년대 전후 교회는 지나친 영적 강조가 합리성을 해쳤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지나친 합리주의가 교회의 영적 신앙을 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성과 이성의 중용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은 마치 사람처럼 사탄이 가까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실재한다고 말합니다. 악한 영이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도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사탄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한 영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은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 삶에 깊이 파고 들어와 있는지 잊고 삽니다. 축사, 신유를 말하면 신비주의자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탄, 귀신이란 말을 꺼내기가 불편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탄의 최대의 속임수는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보들레르라는 철학자는 마귀의 첫 번째 궤계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탄은 실재입니다. 현실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패션 오프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 아주 섬뜩한 장면입니다. 로마 병정들이 광장 중앙에서 예수님을 매질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경꾼들 뒤를 맴도는 두 개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은 음흉하게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인입니다. 여인이 음산하게 쳐다봅니다. 또 하나는 아기입니다. 아기는 아주 음흉하게 웃고 있습니다. 아주 기분 나쁩니다. 사탄은 아기가 아닙니다. 아기의 탈을 쓴 괴물입니다. 사람들 뒤에서 온갖 음흉하고 사악한 일을 조장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 사탄은 없다고 믿도록 온갖 거짓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의 음모를 간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의 음모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길, 사탄의 길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시고 배고픔으로 아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주리다는 말이 헬라어로 페이나오(πεινάω)입니다. 페이나오는 아주 심한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다는 뜻입니다. 굶주림은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유대 역사학자 필로는 굶주림을 모든 악들 중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배고픔과 관련된 경구가 많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삼일 굶고 남의 집 담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배고픔에는 장사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 ‘배고픔은 인간 생존을 위해 가장 긴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때 사탄이 예수님께 돌멩이를 빵으로 만들어 먹을 것을 제안합니다. 아주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이제 금식이 끝났습니다. 어차피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굶주림으로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돌멩이를 빵으로 만들어 먹으면 굶주림의 고통을 아주 빠르고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 마귀의 제안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면 무슨 생고생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쉽게 가세요. 돌멩이를 빵으로 만들면 간단한데 왜 힘든 길을 가세요. 영광스럽고 멋지고 쉽게 가세요.”  

마귀의 제안은 아주 기가 막힌 제안입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동시에 메시야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줄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능력자의 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경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잠깐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메시야의 능력을 자랑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입니다(20:28).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마지막에 사탄과 똑같은 제안을 수제자 베드로가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 그리스도인들이 수 없이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표준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흡족하셨습니다. 이때에 비로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때 비로소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십자가의 신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야할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깜짝 놀랍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아주 심하게 책망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어요. 그냥 꾸짖어도 되는데 사탄이라니요? 주님의 말씀이 너무 심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의 성경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당신을 긍휼히’, ‘당신을 자비롭게’(, 힐레오스 소이)’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관대하게 생각하세요. 당신을 학대하지 마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은 주님! 우리 쉽게 가요.’라는 육신적인 마음이 담긴 말입니다(김한원 교수). “주님! 왜 그러세요. 이제 자신을 그만 학대하세요. 그냥 우리 쉽게 가요. 능력 있으신 것 우리가 다 봤어요. 쉽고 편한 길 있는데 왜 십자가의 길을 가세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그냥 돌로 빵을 만들어 먹읍시다. 52어 기적을 일으키며 갑시다. 그러면 얼마나 쉬워요. 이렇게 하면 끝내줍니다.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무르익은 것 같아요. 이제 십자가의 고난을 한 달 정도 남겨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과 나누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마음의 짐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았을까요? “얘들아! 나는 앞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을 거야! 그렇지만 실망하거나 낙심하면 안 돼! 고난은 잠깐이야. 삼일 후면 나는 부활해. 그때까지 믿음 지키며 잘 견뎌야 해. 그리고 너희들도 내가 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해. 알았지. 이것이 내가 가는 길이고 너희들이 가야 할 길이야. 잘 따라와야 해. 알았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음의 동역자라고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으세요. 어려움을 신앙의 동료와 나누고 싶어 하잖아요. 함께 아픔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길 원하잖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3년 전 사역을 시작하실 때 사탄이 예수님께 했던 말을 수제자 베드로가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 우리 쉽게 가요. 왜 생고생을 하세요. 그냥 돌멩이로 빵 만들어요.” 인류를 구원한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고 계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베드로가 사탄처럼 흔들고 있는 거예요. 수제자인 베드로가 가까이에서 예수님께 사탄의 길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마귀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의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길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길을 간다고 말은 하지만 사탄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 주님의 길을 막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탄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길은 가까이에 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시험은 먹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많습니다. 왜 하필 먹는 시험일까요? 우리말에 주는 대로 먹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잘 먹어야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먹는 것은 간단한 문제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돌멩이로 빵을 만들어 드셔도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먹는 것이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먹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인류 시조 아담도 먹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다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는 먹을 수 없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것은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되는 것이 있고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위치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경계를 만드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땅과 하늘을 나누셨습니다.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구분하셨습니다. 식물도 동물도 모두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시편104:9>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모든 피조물이 경계선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선악과 앞에 선 인간, 이것이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먹는 시험은 아담에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막 먹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만나를 구워먹든지 삶아먹든지 튀겨 먹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에 하루 먹을 양식만 거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만나의 법칙입니다. 다 됩니다. 하지만 하나는 안됩니다. 이것이 만나입니다.  

<출애굽기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그런데 만나의 법칙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아침이면 광야에 만나가 천지로 쌓여 있습니다. 줄을 서는 것도 아닙니다. 배급을 타는 것도 아닙니다. 감시관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거둘 수 있습니다. !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해요. 이것은 너무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이었습니다. 먹을 것에 굶주렸습니다. 그러다가 광야로 나왔습니다. 광야는 애굽 보다 더 막막해요.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침이면 양식이 들판에 가득 쌓여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껏 거두었습니다. 집에 잔뜩 쌓아놓았어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어요. 그랬더니 만나가 썩었어요. 냄새가 나요. 벌레가 생겼어요(16:20). 욕심을 부리고 더 많이 거두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날 먹을 만큼만 거두는 거예요. 이것이 만나의 법칙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먹는 훈련을 아주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만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악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법을 주셨습니다. 정결한 동물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정한 동물은 먹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거나 먹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만 먹을 수 있어요. 음식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백성들과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음식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법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먹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을 정하고 바벨론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먹는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음식법대로 먹고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69년 정도를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땅 바벨론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음식법이 다니엘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했습니다.  

음식법은 신약에도 계속됩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이방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덕스럽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사탄은 우리 삶에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매일 밥을 먹습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친구들과 매일 먹습니다. 하루도 안 먹는 날이 없습니다. 먹는 것이 일상입니다. 먹을 때 잘 드세요. 그리스도인으로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드시지 마세요. 그것을 먹지 않을 때 그리스도인다워집니다. 먹는 것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먹는 것부터 예수님의 길을 갑시다.  

인류는 먹는 것 때문에 죄에 빠졌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병들었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아파요.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금식으로 시작하시면 이 땅을 치료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먹는 것부터 그리스도인의 길을 갑시다. 예수님의 길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작은 것부터 그리스도인의 길을 갑시다. 먹는 시험을 통과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나무 열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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