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성령에 이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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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4:1~11
주일오전예배 | 2017-09-1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몽골의 유목민은 '새의 눈'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평균 시력이 4.0입니다. 13세기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몽고인들은 12km 밖 지평선으로 보이는 말을 탄 사람들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 몽고인들의 시력은 전쟁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티베트의 유목민의 평균 시력은 5.0입니다. 5.0이면 대낮에 하늘의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시력입니다. 한 낮에도 별이 보이는 거예요. 독수리의 시력이 5.0입니다. 독수리는 300-500m 상공에서 물속에 있는 물고기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티베트 유목민들이 시력이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3주 정도 아기를 빛이 차단된 어두운 방에 격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멀리 있는 양의 암수까지 쉽게 구별한다고 하네요.  

더 눈이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국의 서해에 수린 군도가 있습니다. 이 섬에 모겐족이 살고 있습니다. 모겐족의 평균 시력은 9.0입니다. 더 좋은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슈퍼 시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몽골의 유목민, 티베트의 유목민, 태국의 모겐족의 시력의 비결은 생활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드넓은 초원에서 생활하며 항상 멀리 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겐 족은 하루 2시간 이상 하늘의 구름을 본다고 합니다. 시력이 좋은 민족들의 공통점을 보면 다들 평소에 멀리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안과학에서 좋은 시력을 위해서는 틈이 날 때마다 멀리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 컴퓨터, TV 등 우리는 매일 같이 바로 눈앞에 있는 모니터를 보며 삽니다. 멀리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현대인들이 육적인 시력과 함께 영적인 시계도 낮아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멀리 보며 삽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지 마시고 멀리 바라보시며 사시길 바랍니다. 또 낮은 것만 보지 마시고 높은 것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육적인 것과 함께 영적인 것도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1. 성령께 이끌리어

 

예수님께서 서른 살 정도가 되셨을 때 인류를 위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3:23). 예수님은 그 공생애 사역을 성령으로 시작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첫 번째 사건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입니다. 1절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특징은 전적으로 성령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왜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사셨을 까요?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태복음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성령에 이끌리는 삶의 결론은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악한 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도움을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이끌리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 가지 시험을 오직 말씀으로 대응하십니다. 4710절에 세 번의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마귀를 그냥 쫓아버릴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를 정확하게 기록된 말씀으로만 물리치십니다. 성령의 이끌리는 삶의 비결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19세기 영국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뮐러 목사님(독일, 1805-1892)의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7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정기적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기적으로 묵상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내적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첫째가 말씀, 둘째가 기도입니다.  

데니스 레인 목사님의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1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기도입니다. 그리고 열 번째가 말씀입니다. 챨스 스텐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6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기도입니다. 다섯 번째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영적 거장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최고의 지침서입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성령에 이끌리어 사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의 이끄심에 하나님의 깊고 높은 은혜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높은 차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끌리어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나고(ἀνάγω)입니다. 아나고는 위쪽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아나(ἀνά)와 인도하다는 뜻의 동사 아고(ἄγω)의 합성어입니다. ‘인도하여 올린다, 끌어 올린다, 데리고 올라가다, 출항하다는 뜻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장소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썼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누가복음은 이 사건에 단순히 인도하다’(ἄγω)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에는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아내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만이 위로 인도하다는 의미의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태복음은 성령님께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예수님을 인도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얕은 차원에 계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높고 깊고 넓은 차원을 지향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종말에 관한 계시를 받을 때입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요한이 종말에 관한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깊은 영적 세계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끊임없이 요한을 더 높은 영적 세계로 계속해서 끌어올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높은 영적 세계로 자꾸 올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갑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높은 영적 세계로 가게 됩니다.  

한 상담 전문가가 소개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신부가 삶은 감자를 설탕과 함께 가져왔습니다. 신랑이 고추장을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감자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다는 것입니다. 신부는 감자를 어떻게 고추장에 찍어 먹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그 집안 참 웃기는 집안이네!” 집안을 들먹이자 신랑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부부 싸움이 커져 양가 집안싸움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혼까지 거론하게 되었습니다. 신혼부부는 상담 전문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상담자에게 진지하게 묻더랍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먹습니까? 고추장에 찍어먹습니까?” 그러자 상담자는 저는 마요네즈에 찍어먹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웃지 못 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주 소소한 생활의 문제들 속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감자를 삶아 먹든 볶아 먹든 치즈를 뿌려 먹던 설탕을 뿌려먹든 무슨 상관이에요. 자기 취향대로 먹으면 돼지. 현대인들은 별 일이 아닌 것 가지고 죽자 사자 싸우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어른을 보세요. 정치인들을 보세요. 똑같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다투고 있어요. 그러면서 함께 침몰해가는 거예요.  

성령님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여러분! 높이 올라갑시다.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에 서야 합니다. 매일 같은 차원에서 눈 앞에 보이는 별일 아닌 것 가지고 지지고 볶고 싸우지 마시고 좀 더 높은 신앙의 세계로 올라갑시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시다. 요즘처럼 어수선하고 답답하고 매몰되기 쉬운 때에는 이렇게 높이 올라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더욱 절실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높은 곳에 올라 이렇게 노래합니다.  

<18:31~34> 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2.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33.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높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따라갑시다. 거기에 하나님이 높은 은혜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광야 경험

 

성령께서 우리를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십니다. 광야는 결코 좋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광야는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가 있는 곳입니다. 첫째, 광야는 귀신들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물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유대인들은 광야에 귀신들이 활동하는 곳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고통과 시험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에서 시험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동일하게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경험하셨습니다.  

둘째, 광야는 영감과 고결의 장소입니다. 강력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준비의 장소입니다.  

<시편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인은 황폐한 땅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납니다. 시인은 광야에서 거룩해졌습니다.  

<예레미야2: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을 따르며 가나안을 준비했습니다. 광야는 준비하는 곳입니다. 요셉은 13년 동안 광야 구덩이에서 애굽의 총리로 준비되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로 준비되어졌습니다. 엘리야도 광야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했습니다. 광야는 영감과 고결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다음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에서 공생애 사역을 40일 금식하시며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꽃길을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단길을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광야를 가셨습니다. 모래길, 돌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광야는 아주 특별한 장소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 광야입니다.  

성령님은 3,500여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2천여 년 전에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브렌트 빌의 거룩한 나침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빌은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목적지인 하나님께 가는 길을 인도해 줄 거룩한 나침반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는 인생의 거룩한 나침반입니다.  

브렌트 빌은 거룩한 나침반이신 성령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이 있는 쉬운 장소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나침반을 따라서 가다 보면 어려운 장소가 나오기도 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말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를 받았는데도 아기를 말구유에 낳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왜 성령님을 따라가는데 우리 삶에 광야가 나올까요? 왜 힘든 일이 생기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의 영적 근육을 단단하게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날 때 우리가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빌은 거룩한 나침반이신 성령님은 우리를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인도하시기도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아버지 집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예기치 않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전혀 알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이해력이 아닙니다. 따지지 마세요. 이해 안돼요. 이때는 하나님을 믿으세요. 우리는 다 몰라요.  

<시편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하나님의 높은 뜻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어요. 따질수록 답답해요. 그냥 믿는 거예요. 그리고 유유히 예수님처럼 광야를 걸어가는 거예요.  

오스 힐먼의 하나님의 타이밍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대 아라비아에 <광야를 건너는 세 상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사람은 낮에는 광야의 햇빛을 피하기 위해 천막을 치고 쉬다가 별이 빛나는 서늘한 밤에 낙타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른 강 바닥을 걷고 있던 그들에게 멈춰!”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셋은 너무나 놀라 낙타에서 뛰어 내리며 누구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어둠속에서 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내가 말하는 대로하면 나는 너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발 앞에 조약돌이 보이느냐?” 희미한 별빛에 수많은 조약돌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각자 조약돌 하나씩 주어 호주머니에 넣어라.” 세 상인은 순순히 강바닥에서 조약돌을 하나씩 집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이곳을 떠나라.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쉬지 말고 계속가라한 상인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 음성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그 음성은 한 가지만 애기하마. 아침이 되면 너희는 행복한 동시에 슬플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 상인은 걸음을 재촉하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행복한 동시에 슬플 거라고?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드디어 저 멀리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상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호주머니에 있던 조약돌을 꺼내 들었습니다. 조약돌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보석이었습니다. 하나는 루비, 다른 하나는 에메랄드, 나머지 하나는 사파이어였습니다. “보석이다!” 한 상인이 기쁨에 들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런 젠장!” 옆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럼 강바닥에 수많은 보석들이 깔려 있었는데 우리는 겨우 하나씩만 가지고 왔다는 거야?” “저것 좀 봐!” 세 번째 상인이 뒤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광야에 심한 바람이 불더니 그들이 왔던 발자국을 모두 지워 버린 것입니다. “이젠 우린 그 길을 찾아갈 수가 없어!” 광야에서 들린 음성이 옳았습니다. 상인들은 행복했지만 동시에 매우 슬펐습니다. 광야에서 부를 발견했지만 더 많이 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통과하는 광야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끄셔서 당신의 지혜와 은혜의 보화를 우리의 호주머니에 넣게 하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찮게 여기고 한두 개의 조약돌만을 주울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발견한 그 보화로 인해 행복하지만 동시에 더 많이 챙기지 못해 슬퍼합니다.

 

3. 시험을 받으러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정면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이 타락한 피조물이 주되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정면으로 돌파하셨습니다.  

복싱 헤비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마이크 타이슨을 아실 것입니다. 타이슨이 전성기일 때 그를 상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공포의 주먹 그 자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권투를 막 시작한 유치원생이 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싱 협회가 그 유치원생과 타이슨 경기를 진행하려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타이슨에게는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입니다. 아니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말도 안 돼는 일로 예수님을 이끄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시험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에 빠질 확률도 0프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감히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험을 받으러라는 말은 시험 받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시험을 받기 위해 정면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답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답게 마귀가 장난치든 말든 광야를 유유히 걸어가셨습니다.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입니다. 모세는 고통당하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민족이 애굽 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족이 불쌍했습니다. 그를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구해준 히브리 민족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비밀 결사대를 만들어 애굽을 전복시키고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려고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뒤에 숨기고 수군수군하고 음모를 꾸미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이 마귀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귀의 방법을 사용하지 마세요. 마귀만 좋아해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왕자입니다. 전혀 왕자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40년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십니다. 손에 지팡이 밖에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최강의 나라 바로 왕과 맞짱을 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모세답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모세다울 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다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답기를 원하십니다.  

오스트리아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유대계)인간의 길(The Way of Man)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자아를 찾는 것이 우리가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부버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 갈 수 있으나 사람마다 방법은 다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정해진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흉내 내며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부버는 수샤라는 랍비이야기를 했습니다. 수샤는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갔습니다. 수샤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못했느냐?”고 질문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너는 왜 좀 너답게 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내가 나답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부버는 나다운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나를 발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나다움을 찾으며 나답게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인다움을 찾읍시다.  

포커 용어 중에 포커페이스(Poker f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포커페이스는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도록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카드놀이를 할 때 많은 돈이 오갑니다. 자칫 잘못하면 큰 돈을 잃을 수 있어요.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은 상대 눈치를 살핍니다. 이때 자신의 카드가 좋은지 나쁜지 상대방이 눈치 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항상 일관성 있는 얼굴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게임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자기감정을 들키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포커페이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도 포커페이스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나쁜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자기 일을 하는 거예요. 쉽게 웃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포커페이스가 필요합니다. 광야를 만나도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포커페이스이셨습니다. 성령께서 광야로 이끄십니다. 그런데 묵묵히 가시는 거예요. 마귀가 시험합니다. 정말 기분 나빠요. 자존심 상해요.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냥 가시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광야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의연하게 광야를 걸어갑시다. 성령의 이끄심을 믿읍시다. 그리고 나답게 걸어갑시다. 그리스도인답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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