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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알리기에리 단테(Alighieri Dante)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테가 쓴 《신곡 Divina Commedia》(1307?∼1321)은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은 단테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단테입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평생에 걸쳐 제작을 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지옥의 문>의 속에 있는 작품입니다. 후에 로댕이 <생각하는 사람>만 따로 제작을 해서 발표를 했습니다.
단테가 신곡을 쓰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단테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랍니다. 성인이 되어서 정치에 입문합니다. 그때까지 단테는 편안한 생활을 계속합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정치인이었습니다.
13세기에 피렌체는 황제파(기벨린 당)와 교황파(겔프당)의 대립이 아주 심했습니다. 단테는 교황파의 수장이었습니다. 권력 다툼에서 황제파가 권력을 잡습니다. 단테는 1302년에 황제파에 의해 공금횡령과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됩니다. 그리고 벌금형과 공직을 금지한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단테는 황제파에 의해 고향 피렌체에서 라벤나로 영구 추방당합니다. 이때부터 단테의 망명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321년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열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전전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향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단테는 이탈리아의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합니다. 아주 쓰라린 인생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단테는 쓰라린 아픔 속에서 천국과 지옥의 환상을 봅니다. 그것을 쓴 것이 바로 <신곡>입니다. 망명 생활이 단테의 삶과 문학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 쓰라린 생활이 <신곡>이라는 대작을 탄생시킵니다.
시인 정호승 씨의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에 /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니다 / 가시나무에 / 아름다운 꽃이 있는 것이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름이 탄생합니다. 야곱의 생애에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초가 생깁니다. 또 믿음의 후대에 전해지는 영적 교훈이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 야곱이 겪은 인생에 가시 속에서 탄생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야곱의 인생의 가시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챕니다. 이로 인해 형이 동생을 죽이려고 합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야곱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은 평안히 다시 돌아온다면 벧엘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하지만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갑니다. 세겜이 벧엘 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살면서 세겜 사람처럼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상을 심하게 섬겼습니다. 철저하게 세겜화되었습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믿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천사와 씨름을 해서 이깁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세겜에서 사는 야곱 모습에서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의 거룩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새로워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명령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야곱은 의복을 정결케 하고 우상을 버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회복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께 받았던 약속도 재확인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야곱의 가슴을 찌릅니다.
첫번째 가시 -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
첫 번째는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입니다. 8절에 벧엘로 올라간 야곱은 드보라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8절). 드보라는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를 돌본 사람 같습니다. 어머니가 고향 밧단 아람에서 떠나올 때부터 줄곧 함께 했습니다(창24:59). 언제부터 어머니의 유모인 드보라가 야곱과 함께 했는지는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머니 리브가가 죽은 후에 야곱과 함께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지 못했던 야곱에게 유모 드보라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를 키운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곁을 평생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향취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벧엘에 올라가자 그 어머니의 유모가 죽습니다. 유모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했는지 야곱은 유모를 장사하고 그곳 이름을 “알론바굿”(곡함(통곡)의 상수리나무)이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가시 - 라헬의 죽음
그런데 한 술 더 뜨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씩 두 번 14년을 수고 했습니다. 처음 7년은 며칠처럼 여길 정도로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20년 동안의 타향살이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라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사랑하는 그 아내 라헬이 죽습니다. 그것도 여행 중에 막내 아들을 낳다가 산고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는 중에 아내가 죽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벧엘에서 만난 두 번째 가시입니다.
세번째 가시 - 르우벤의 통간
야곱의 세 번째 가시가 있습니다. 라헬을 장사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야곱은 고향 땅에 장막을 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 때 큰 아들 르우벤이 자신의 첩 빌하와 통간을 합니다. 빌하는 아내 라헬의 종이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라헬이 자신의 종이었던 빌하를 남편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첩 빌하에게는 라헬의 향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빌하를 르우벤이 범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르우벤이 야곱에게 얼마나 중요한 아들이었는지 야곱은 르우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9장 3절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
이 말 속에서 르우벤에 대한 야곱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장자 르우벤에 대한 야곱의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는 아들이 자신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철썩 같이 믿던 아들이 자신의 발등을 찍었습니다. 무엇을 좀 새롭게 하려고 하는데 자꾸 일이 터집니다. 그것도 이것이 벧엘에서 만난 야곱의 세 번째 가시입니다.
네번째 가시 - 아버지의 죽음
네 번째 가시는 아버지 이삭의 죽음입니다. 이삭은 야곱 보다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야곱은 어렸을 때부터 형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편애 속에서 소외되어 살았습니다. 이삭은 늘 형 에서에게 애정을 쏟았습니다. 형 에서 앞에서 야곱은 항상 찬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집을 떠난 지 30년 만에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 형에게 빼앗긴 부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가슴에 사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유모 리브가의 죽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습니다. 약속에 땅에서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첩과 통간을 합니다. 게다가 30여년 만에 만난 아버지 이삭이 홀연히 죽습니다. 은혜를 받고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자꾸 제동이 걸립니다. 끊임없이 삶의 가시가 야곱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비수를 꼽았습니다. 상처를 후벼 팠습니다.
하지만 이 가시 때문에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 고난 때문에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형을 피해 삼촌의 집으로 도망갈 때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촌 라반에게 사기 결혼을 당할 때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네 아내와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삼촌이 10번이나 자신의 삯을 속일 때는 타향살이에 하소연할 곳이 없어 홀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삼촌 보다 거부가 되는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삼촌과 삼촌의 아들들이 죽이려고 했지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병사 400명을 이끌고 나올 때는 밤잠을 자지 못하고 천사와 씨름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 인류 역사에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굽이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역전시켰습니다. 환난이 인생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역경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는 못합니다. 가시가 아프긴 하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을 끝장내지 못합니다.
필립얀시라는 “때문에 은혜”라는 말을 썼습니다. 때문에 은혜란 말은 무슨 말일까요?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에 혼인집 신랑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때문에 은혜’입니다. ‘때문에’ 은혜를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요, 복수보다 강하고 인종차별보다 강하고, 증오보다 강한 힘을 발하는 영적 신성(新星)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은혜>를 안 야곱은 라헬이 죽어가며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짓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으면서 산고가 너무 심해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했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베노니가 아니라 베냐민이라고 짓습니다.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쪽은 영광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말은 영광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은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이 죽지만 그 아픔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습니까? 남들은 너무 힘들어서 베노니라고 할 때 베냐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고통이라고 말할 때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짜증이라고 말할 때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세상의 어떤 힘도, 세상의 어떤 존재도, 세상의 어떤 고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중단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시 속에서도 계속됩니다.
2. 가시 속에 감추인 12보석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모세는 야곱의 생애를 기록하다가 23절부터 갑자기 야곱의 네 명의 부인과 열 두 아들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나라 이름의 시작은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이 열두 아들입니다. 이 열두 아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출애굽기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대제사장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 가슴 부분에 열두 보석을 네 줄로 달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를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셨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가슴에 그 열두 지파를 품게 하셨습니다. 제사장의 양 어깨에는 호마노라는 보석이 견장처럼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 두 이름 지파의 이름을 여섯 씩 이 보석에 새기게 했습니다(출28:9-10). 하나님은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열두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그 약속의 땅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깁니다. 이 열두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셨는지 요한계시록에 보다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크고 높은 성곽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 성은 장차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영원히 거할 처소입니다. 이 영광된 성에, 이 거룩한 성에 열두 문이 있는데 이 문에 바로 열두 지파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열두 명의 아들을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 열두 대문에 영원히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열 두 아들이 정말 보석과 같은 존재인가요? 아닙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서모와 통간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칼의 힘을 자랑해서 세겜 사람들을 몰살시켰던 사람들입니다. 네 명은 첩의 아들입니다. 전혀 자랑할 만한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 이름을 부를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영광된 사람인가요?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나그네로 들어왔습니다. 땅 한 평 없는 장사치였고 뜨내기에 불과했습니다. 이삭은 어떤가요? 야곱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하찮은 존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주님의 가슴에 우리의 이름이 찬란한 보석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주님으로 불려지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보세요. 오늘 본문 23절부터 26절까지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기사 앞에 기록된 사건이 무엇인가요?
유모 리브가가 죽습니다. 아내 라헬이 아이를 낳다 죽습니다.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간통을 합니다. 그러면 뒤에는 어떤 사건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바로 아버지 이삭의 죽음입니다.
앞에는 유모 리브가와 아내 라헬의 죽음 그리고 르우벤의 통간 사건이 있고 뒤에는 아버지 이삭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야곱의 인생의 고난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싸고 있는 형상입니다.
성경을 시간 순서로 기록하다 보니 우연히 이렇게 기록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미입니다. 야곱의 삶의 수 없이 많은 가시가 있었지만 그 가시는 오히려 12 보석을 낳고 보호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모세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야곱의 고난 속에 12명의 아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가시 같은 고난이 우리가 못나서 당하는 것일까요? 남들 보다 죄가 많아서 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시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열두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 우리를 열두 보석처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저의 어머니가 사는 시골집에 주변에 아주 커다란 호두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호두가 꽤 많이 열립니다. 그런데 그 나무 주인은 그 호두를 기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청설모가 주인보다 먼저 따먹어버려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집 앞 뒤로 조그만 밤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굵은 알밤이 떨어집니다. 청설모가 밤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시 때문입니다. 밤송이 가시가 알밤을 보호합니다.
나희덕 씨(조선대 교수, 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산문집 <빈통의 물>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가시는 꽃과 나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또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찔리면서
사람은 누구나 제 속에 자라나는 가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 심어지고 나면 쉽게 뽑아 낼 수 없는
탱자나무 같은 것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뽑아내려고 자신을 찔러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내내 크고 작은 가시들이 나를 키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병 때문에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질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의 가시이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교만하지 않게 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온전케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기뻐했습니다(고전1:7 이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마태복음 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런데 예수님의 가시관이 금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예수님의 머리에 있던 가시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금 면류관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삶에 있는 가시관은 금 면류관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가시 때문에 고통이 따르지만 가시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됩니다. 오히려 그 가시가 영광이 될 것입니다. 가시가 내 삶을 지키고 키우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가시 속에 보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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