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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에밀 리누프(Emile Renouf)는 1881년에 <돕는 손>(The Helping Hand)이라는 작품을 발표합니다.
이 그림에는 망망대해에 조그만 배 한 척이 그려져 있습니다. 배에는 늙은 어부와 나이 어린 소녀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소녀는 노인의 손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배에 나란히 앉아 커다란 노를 함께 잡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노를 젓는 것 같습니다. 소녀는 자기가 노를 젓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는 할아버지가 젓는 것입니다. 어쩌면 소녀의 힘은 배를 젓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노를 젓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요. 소녀의 체구를 보면 커다란 노를 젓는 것이 가능해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손을 내려놓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소녀와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가 무엇을 하면 아빠를 도와준다고 아이들이 제 옆에서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일을 더 힘들게 해요. 어떤 때는 방해가 돼요. 시간이 더딥니다. 하지만 저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소녀가 노에 손을 얹고 있어서 할아버지가 노를 젓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소녀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단지 소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노를 함께 젓고 있지만 배는 할아버지에 의해서 할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할아버지 옆에서 소녀는 평안합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노를 젓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있는 한 안전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노를 우리가 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조금 받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가 계획하는 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노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우리의 인생의 노를 젓고 계십니다. 강하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가십니다. 이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돕는 강한 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옆에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이 당신을 이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가세요.
1. 명령 - 장망성에서 떠나라
6절에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북방 땅’은 고대 바벨론(BC625-539)입니다. 7절에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입니다.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피하라는 말은 빠져 나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빠져 나오라고 하십니다.
스가랴가 이 복음을 기록할 때(주전521~486)는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호령하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는 때입니다. 바벨론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문명을 이룬 나라입니다. 바벨론은 학문 예술 교육 문화 기술이 집중된 곳입니다. 또 아주 큰 강대국입니다. 지금의 미국과 중국을 합친 정도의 나라입니다. 바벨론은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BC606년에서 586년 사이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유대를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70년을 살았습니다. 바벨론에서 일을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2세가 태어났습니다. 바벨론에서 성공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바벨론에서 삶의 터가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538년 바사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왜요? 예루살렘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있습니다. 성은 무너졌습니다. 황무지가 됐습니다. 살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반면에 바벨론은 살기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산업 문화 교육 예술 등 모든 곳의 중심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바벨론에 살면서 삶의 기반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굳이 황폐한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을 떠나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벨론이 너무 좋았을 거예요. 바벨론은 지금의 뉴욕 같은 곳이었을 거예요. 뉴욕에서 성공한 사람이 독도나 울릉도 같은 곳에 가서 살라고 하면 가겠어요? 안갑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그들은 바벨론의 문화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너희는 바벨론에서 피하라는 것입니다.
<6절>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절>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똑같은 말씀을 이사야 선지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48:20>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바벨론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왜 바벨론을 떠나야 할까요? 그것은 바벨론은 장차 망할 성, 장망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천사가 큰 소리로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바벨론은 세상 문화에 대한 상징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온갖 것을 얻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것을 누립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바벨론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이 세상은 무너질 바벨론입니다. 우리는 <세상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 바벨론을 떠난다는 말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신앙으로만 살라는 말일까요? 아니면 선교사가 돼서 아프리카 오지로 떠나야 한다는 말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닙니다. ‘바벨론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모든 것이 우선합니다.
<마태복음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면서 이 세상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장망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적 출바벨론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존 번역의 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존 번역은 17세기 영국의 침례교 설교가입니다. 천로역정은 그리스도인이 천국 가는 여정에서 겪는 일들을 우화 형식으로 쓴 소설입니다. 그런데 아주 교훈적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일들을 실제적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그래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2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성경이 들어가는 곳에 천로역정이 함께 따라갈 만큼 많이 읽힌 책입니다.
번연이 어느 날 꿈을 꿉니다. 꿈에 한 사나이가 보입니다. 그는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진 초라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마치 집을 떠나온 나그네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극심한 두려움에 몸서리를 칩니다. 그러더니 하늘을 우러러 신음하며 낮게 절규하기 시작합니다.
“아!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보고 있던 책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멸망시’가 언젠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그는 또한 그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아내와 네 명의 자녀들 모두 이 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크리스챤'은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 무서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족들은 몹시 놀랐지만 도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들렸기에 수긍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미친 사람처럼 취급했습니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가족들은 '크리스챤'을 잠자리에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수많은 번민으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계속되는 한숨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크리스챤은 자신의 상태를 염려하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안 좋아졌어. 어제보다 더 안 좋아졌단 말이야.”
그리고는 어제 했던 그 이야기를 또다시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빈정거리는 말투로 크리스천을 대했습니다. 심지어 엄하게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가족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크리스챤은 가족들을 뒤로 하고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천국 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전도자를 만나 등에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죄의 짐을 해결하고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이 책은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여정을 그린 책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사세요. 그러나 세상에는 매이지 마세요.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장망성입니다.
<이사야19:18>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멸망의 성읍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장망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장망성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바벨론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바벨론을 떠나세요, 바벨론 문화, 바벨론 쾌락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바벨론은 장망성입니다. 장망성을 떠나세요. 장망성을 떠난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2. 약속 1 - 하나님의 눈동자
첫째, 하나님의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8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범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가(으)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물체나 대상을 손으로 만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쉽게 말해서 눈동자를 범한다는 말은 손을 눈으로 만졌다는 말입니다. 눈을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까? 눈을 손으로 만진다는 말은 손가락으로 눈을 찔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 만군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나에게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기시고, 너희를 약탈한 민족에게로 나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손대는 자는 곧 주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다.“
<현대어 성경> 영광의 주께서 너희들을 탄압하던 민족들에게 나를 보내셨다. 너희를 헤치는 자는 손가락으로 여호와의 눈을 찌른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찌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알 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시편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신명기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제자들은 한 밤 중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계시지 않고 육지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6: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의 눈이 너무 좋으셔서 몇 킬로 떨어져 있는 제자들을 육지에서 보시고 계시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의 눈이 독수리나 매의 눈인가요? 아니면 한 밤중에도 잘 보이는 올빼미 눈인가요? 그래서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배를 보고 계셨나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시력이 동물처럼 발달해 2-3km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완전히 다른 곳에 계셨지만 제자들을 자신의 눈동자 같이 돌보시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십니다.
3. 약속2 -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9절>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는 여호와의 사자(슥1:12)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 손’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그 큰 능력’이이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그 큰 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8:19>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님의 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3:14>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를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원수들 위에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움직인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누프입니다. 누프는 이리저리 움직이다, 흩뿌리다, 살포하다는 뜻입니다.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다는 말은 손이 여기 저기 움직이는 것 또 흔드는 것 혹은 이슬이 내리듯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원수 위에 여기 저기 움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한 밤 중에 이슬이 소리 없이 내리듯 우리 삶에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항상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했습니다. 그 강하신 하나님의 손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시편138: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4. 약속3 - 임마누엘
세 번째 약속은 임마누엘입니다. 10절과 11절에 내가 네 가운데 머물리라고 하셨습니다.
<10절>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11절>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가운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타웨크입니다. 타웨크는 중앙에, 한 가운데에, 한 복판에라는 뜻입니다. 네 가운데 머물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 삶의 ‘한 중앙에’ 내 삶의 ‘한 복판에’ 머무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한 중앙에 계십니다.
머물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솨칸(솨켄)입니다. 솨칸은 (머무르기 위해) 앉다, 정주하다, 묵다, 살다, 거주하다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에 살았습니다. ‘머물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장막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산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 아픔을 겪습니다. 그 아픔이 주변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그 아픔이 가장 많이 전해지는 대상이 한 집에 사는 가족입니다. 그런데 한 집에 살아도 자식들은 조금 밖에 느끼지 못해요.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은 한 방에서 함께 자는 부인입니다. 그런데 부인도 한계가 있어요. 몇 년 전에 제 아내가 제게 이런 말을 해요. “당신한테는 미안한데 당신이 힘든 것이 나에게는 잘 안 느껴져요.” 제가 그래서 미안할 것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거든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감은 하지만 그 사람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에 들어와 계세요. 그리고 내 삶의 한 복판에 들어와 계세요. 하나님은 내 삶의 한 복판, 한 중앙에서 나와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일에 깊이 관여하셔서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나와 함께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나 삶의 한 복판에 나와 함께 하십니다.
가이드포스트에 실린 글입니다. 메이시라는 사람의 간증입니다.
내가 여섯 살 때 우리는 오클라호마 시에 살았는데 동네에서는 언제나 밤이면 문을 잠그고 빗장을 질렀습니다. 뒷문으로 나가기 위해서 아버지는 안에서 질러진 빗장을 열기 위한 특별한 열쇠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밤 나는 천둥과 번개 소리와 쏟아지는 빗소리에 놀라 갑자기 잠이 깨었습니다. 복도를 지나 부모님이 계시는 방으로 달려가는데 거실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와 불길 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이 벼락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불길 때문에 앞문으로 갈 수 없었고 뒷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습니다. 공포가 엄습해오려 할 때에 난 어둠 속에서 따스한 아빠의 손이 복도 아래로 날 이끌어 뒷문을 통해 뒷마당으로 인도해주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는데 그분은 손을 놓고 사라져 갔습니다. 겁이 난 나는 집을 향해 되돌아섰습니다. 그때 엄마가 “메이시! 메이시!”하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엄마! 여기 밖에 나와 있어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엄마는 내게 달려왔고 우린 함께 집 앞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아빠가 아기 동생 켄트와 세 살짜리 여동생 에이미를 데리고 서 있었습니다. “메이시, 무사했구나!”하고 인도의 한숨을 쉬며 아빠는 말씀하셨습니다.
“널 데리러 가려 했는데 불길 때문에 건너갈 수가 없었어.”
아빠는 나를 복도로 이끌어 주지 않았고 뒷문에 질러진 빗장을 열어주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벌써 12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내오는 동안 그때 나를 인도해주었던 그 손의 따스한 감촉을 잊지 못합니다. 그 손은 오늘도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십니다.
여러분! 세상 바벨론을 떠납시다. 장망성을 떠납시다. 그리고 천성을 향해 갑시다. 주님은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에서 함께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강한 손이란 표현이 15번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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