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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울창한 숲 속에 사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슴은 목이 말라 호숫가로 갔습니다. 머리를 숙여 물을 마시던 사슴은 문득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슴은 자기 머리 위에 여러 갈래로 힘차게 뻗어 있는 아름답고 웅장한 자신의 뿔에 스스로 감탄을 합니다.
“내 뿔은 정말 아름답단 말이야! 어쩜 이렇게 멋질까?”
그러다가 자신의 가느다란 다리를 보게 됩니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다리는 아주 수치스러웠습니다. 사슴은 실망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런데 내 다리는 왜 이렇게 가늘고 못 생겼지? 이런 다리는 없는 것만 못해.”
늦은 오후 들판에서 풀을 뜯던 사슴은 사자가 자신을 향해 살금살금 접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놀란 사슴은 정신없이 숲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늘씬하고 날렵한 다리 덕분에 사슴은 사자보다 더 빨리 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자 뿔이 나뭇가지에 걸립니다. 사슴은 뿔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뒤따라오던 사자는 무시무시한 발톱과 이빨로 사슴을 덮쳤습니다. 사슴은 죽기 직전에 이렇게 한탄합니다.
“아! 슬프다. 내가 부끄러워한 이 다리가 내 목숨을 구했는데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내 뿔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구나!”
이솝우화에 나오는 <사슴의 뿔과 다리>라는 스토리입니다. 부끄러움이 생명을 살렸습니다. 하지만 자랑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인생을 살다보면 장점 또는 강점 때문에 위험에 빠집니다. 오히려 약점 또는 단점이 우리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아름다움, 예쁨, 잘생김, 뛰어남, 강함, 잘남 등을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아름답지 않음, 예쁘지 않음, 잘 생기지 않음, 뛰어나지 않음, 약함, 못남을 숨기며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함, 부족함, 연약함, 단점을 자랑합니다.
1. 삶에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다
사도 바울은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7절 중간에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가시’라는 말이 헬라어로 스콜롭시(σκόλοψ)입니다. 스콜롭시는 가시, 침, 바늘, 들보, 십자가, 나무 조각, 말뚝 등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고정시키기 위해 쓰이는 나무못이나 끝이 가늘고 예리한 가시를 말합니다. 육체에 뾰족한 가시가 있다는 말은 가시로 몸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계속 느끼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몸에 아주 고통스러운 난치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육체에 큰 아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앓던 질병을 아주 심한 안질이나 간질병 또는 말라리아나 심한 두통이 아닐까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또 우울증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가시가 찌르듯 바울의 몸을 늘 아프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육체에 있는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병 때문에 심적인 고통도 아주 컸던 것 같습니다. ‘치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콜라피조(κολαφίζω)입니다. 콜라피조는 ‘주먹’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주먹으로 치다, 심하게 때린다, 학대하다’ 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습니다.
<마태복음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여기서 ‘주먹으로 치고’라는 말이 콜라피조입니다. 앞에서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거나 머리를 쾅쾅 때리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자존심이 아주 상합니다. 아주 심한 모멸감으로 느낍니다. 바울은 육체에 가시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계속 느꼈습니다. 또 육체에 가시는 바울을 주변 사람들에게 심한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권사님이 제게 딸을 위해 기도해달라며 딸의 질병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중에 딸이 엄마가 제게 기도를 부탁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딸이 창피하게 왜 목사님에게 말했느냐며 울고불고한 적이 있습니다. 남들에게 말하기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질병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남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 같아 말하기 꺼려지는 질병이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더 그랬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병을 죄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질병은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에는 엄청난 기적이 있었습니다. 각색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 자신은 병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거예요. 얼마나 아이러니예요? 기도로 다른 사람은 고쳐주는데 정작 자기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속으로 이러지 않았을까요?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주제에 누구를 기도 해준다고!” “자기 병도 못 고치는데 저거 사이비 아냐?” “저 병은 저주 받은 건데.”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육체적인 아픔은 물론 심적인 고통까지 가중시키는 내면의 깊은 상처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는 형태와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나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가족이 가시인 경우가 있습니다. 자식이 찌르는 가시인 경우가 있습니다. 자식 때문에 늘 아파요. 어떤 경우에는 부모가 가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가시예요. 옆에서 자꾸 찔러요. 그래서 아빠 때문에 늘 아파요. 엄마가 자꾸 찔러요. 배우자가 가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내나 남편이 살면서 늘 찔러요. 여러분은 가시가 되지 마세요. 또 환경이 가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또 질병이 가시인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 신학계의 거장이신 정류(靜流) 이상근(李相根)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상근 목사님이 16살 때 발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대구 달성공원 느티나무 밑에서 40일 동안 작정기도를 하였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3년 동안 바깥출입을 못하였습니다. 학교 갈 나이에도 학교를 못가고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 어머니가 구해오신 한약을 발에 붙였는데 독이 되어 평생 고통을 주는 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상근 박사는 대학 진학도 못하고, 검정고시로 과정을 마쳤습니다. 발이 아파 밖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방안에서 성경을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때 성경을 머릿속에 입력시킨 것이 후에 성서 대학자가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상근 박사는 60년 동안 발의 이상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은퇴 후에 외과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통해 발뒤꿈치에서 1.5㎝의 머리카락 굵기의 철사를 발견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맨발로 다니다가 찔린 철사가 속에 들어가 가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박사님은 그 철사를 가지고 다니면서 늘 이렇게 자랑삼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가시를 보십시오. 내 발꿈치에 60년 동안 박혀 있던 가시입니다. 이 철사가 나의 가시가 되어 60년 동안 나를 찔렀습니다. 이 가시는 나를 성서학자가 되게 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이상근 박사님은 가시를 손에 들고 이 가시가 아니었으면 주석학자가 될 수 없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사람은 삶에 누구나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만 없으면 난 정말 행복할 텐데! 이것만 없으면 남부러울 것 없는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가시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를 불평하기보다 가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시를 극복할 때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장미의 아름다움은 가시를 포함합니다. 우리 인생은 가시를 포함합니다. 가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여러분 가시를 잘 견디시길 바랍니다.
2. 가시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몸에 가시를 주신 이유는 바울을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자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페라이로(ὑπεραίρω)입니다. 이 단어는 ‘~위로’라는 뜻의 전치사 휘페르(ὑπέρ)와 ‘들어올리다’는 뜻의 동사 아이로(αἴρω)의 합성어입니다. 문자적인 의미가 위로 스스로를 끌어 높인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높이다. 들어 올리다, 오만한 태도를 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은 자고(自高)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스스로를 높이는 자고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은 바울의 자만을 경계하셨을까요?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의 이력은 이렇습니다. 첫째, 정통 할례를 받은 유대인입니다(빌3:5). 유대인들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팔일 만에 할례받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족속입니다(빌3:5).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을 계승한 적통 혈통입니다. 순수한 이스라엘 민족의 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베냐민 지파입니다(빌3:5). 이스라엘 1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입니다. 메대 파사 시대에 하만의 음모로 이스라엘 민족이 몰살을 당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모르드게와 에스더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지파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롬11:1).
넷째,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빌3:5).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혈통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바리새파이었습니다(빌3:5). 유대교에는 여러 개의 종파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종파가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여섯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행22:3). 가말리엘(힐렐의 손자)은 유대 역사에서 <율법의 영광>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최고의 학벌을 가졌습니다.
일곱째,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행22:25)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시만권을 가진 사람은 직접세를 내지 않았습니다. 병역의 의무도 없었습니다. 어디서나 세계최강의 로마군대에게 보호를 받았습니다. 로마시민권은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오늘날 미국 시민권 보다 더 끗발이 있었습니다.
여덟째, 당시 국제어인 헬라어를 마음대로 구사했습니다. 바울은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가졌던 이력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가진 이력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느낌이 잘 오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금수저 중에 금수저입니다. 또 엘리트 중에 엘리트입니다. 교만하기에 딱 좋은 이력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바울의 행적은 놀라웠습니다. 첫째,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성경 역사에서 흔치 않은 부르심입니다. 둘째,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썼습니다. 혼자 신약성경의 반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교회 역사상 바울을 능가하는 신학자가 없습니다. 셋째, 3차 전도여행으로 유럽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넷째, 따르는 표적이 있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앞치마나 손수건을 갔다가 병든 자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행19:12). 엄청난 기적입니다. 다섯째, 3층천에 올라갔다가 왔습니다. 3층천이라는 천국을 말합니다.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는 정말 신비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외적으로 교만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의 몸에 바울이 자만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만약 바울이 육체에 가시가 없었다면 바울은 자만했을 것입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자기 자랑이나 하는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체에 있는 가시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만은 역겨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심각한 교만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부자라고 자랑은 하지만 신앙은 미지근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교만은 역겨운 감정입니다.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 하지 맙시다. 교만은 사람도 주님도 역겨워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하나님은 다른 죄는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교만은 팔을 걷어붙이고 다루시고, 탐심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지만 교만에 대해서는 열 배로 더 무거운 심판을 내리신다.”라고 했습니다.
혹시 가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가시입니다. 그 가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탄의 사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시가 있어도 교만해요. 여러분! 내 삶에 있는 가시를 우리 가슴에 새기며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어거스틴은 ‘교만으로 천사는 마귀로 전락하고, 겸손으로 사람은 천사로 승격한다.’고 했습니다. 가시 속에 담겨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합시다.
3.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하게 한다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는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기 위해입니다. 바울은 몸에 있는 사탄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냥 세 번이 아닐 것입니다. 아주 간절한 기도를 세 번 했을 것입니다. 또 끈질긴 기도를 세 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끈질기고 간절한 기도에 Yes가 아니라 No로 응답하셨습니다.
<9절 상반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족하다’는 말이 ‘충분하다 넉넉하다 만족하다’(ἀρκέω)는 뜻입니다. 이미 바울에게 주님의 은혜는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더 구하는 것은 바울의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Yes도 Yes이지만 No도 Yes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본질적으로 항상 Yes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응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하지 마세요. 기도의 응답은 항상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다고 하지만 주님은 넉넉하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충분하게 주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No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9절 중반절>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약함은 우리 주님의 능력을 들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여기 ‘온전하다’는 말이 ‘완전하게 하다, 완성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약해질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서 더욱 온전해집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들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은 역설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없이 그리고 수없이 약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낙심합니다. 절망을 느낍니다. 약한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능하고 못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도 합니다. 부모를 원망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세요. 내가 약해질 때 하나님의 능력은 더 커집니다. 내가 점점 약해지면 하나님의 능력은 점점 강해집니다. 내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안될 때 안됨을 인정하세요. 부족할 때 나의 부족을 인정하세요. 한계를 느낄 때 나의 한계를 인정하세요. 어쩔 수 없을 때 그냥 “이제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세요.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마세요. 거기서 끝내지 마세요. 인간적인 한계에서 멈추지 마세요.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약함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흙으로 만든 보잘 것 없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원래 약합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자랑합니다.
<9절 하반절>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머물다’는 말이 헬라어로 에피스케노세입니다. 이 말의 뜻은 천막같이 온 몸을 덮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문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를 덮는다는 것입니다.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천막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하세요.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랩에이치 (THE LAB h) 대표 김호 씨는 “강점이 같으면 경쟁자가 되지만, 약점이 같으면 우리는 급속히 친해진다. 약점이 가진 강점이다.”라고 했습니다. 약점이 강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약점이 강점입니다.
1938년 대하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탄 펄 S. 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6.26.∼1973.3.6)에게는 지능 장애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내 딸이 저능아가 아니었으면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였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우쭐댔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정신이 박약한 딸을 주셔서 모든 사람은 귀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펄벅은 저능아이었던 딸이 자신을 소설가가 되게 했다고 합니다. 그 딸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이 대지입니다. 저능아이었던 딸을 엄마에게 저능아 딸은 큰 약점입니다. 약함입니다. 한없는 눈물이고 가슴 절임입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육신이 가시입니다. 이 약점 때문에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사람을 귀히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 가시가 펄벅을 작가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지>라는 소설의 집필을 통하여 세계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시가 엄마를 온전케 했습니다.
브와그완은 ‘겸손은 신이 사람에게 내린 최고의 덕이다.’라고 했습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 배고픔을 자랑합시다. 약함을 자랑합시다. 그 약함이 내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들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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