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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모든 사람의 코에는 아주 미세한 양의 철(fe)이 있습니다. 이 철이 커다란 자장을 가지고 있는 지구에서 방향을 잡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이 캄캄한 밤 중에도 방향을 잃지 않는 이유가 코에 있는 철 때문입니다. 사람의 콧구멍은 두 개입니다. 사람은 콧구멍을 하나씩만 사용합니다. 코에 손을 대 보세요. 바람이 한쪽에서만 나옵니다. 3~4시간이 지난 다음에 콧구멍에 다시 손을 대보세요. 바람이 다른 콧구멍에서 나옵니다. 3~4시간마다 콧구멍은 서로 임무교대를 합니다. 한쪽 콧구멍이 숨을 쉬는 동안 다른 콧구멍은 냄새를 맡습니다. 코는 만 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눈의 근육은 24시간 동안 약 100,000번 움직입니다. 하루는 86,400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눈의 근육은 1초에 1번 이상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리가 이 정도의 운동을 하려면 적어도 80km는 걸어야 합니다. 손가락에는 지문이 있습니다. 이 지문이 다 다릅니다. 지문이 같을 가능성은 64.000.000.000대1입니다. 지구 인구가 6백 4억이 되면 똑같은 사람이 하나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혈관은 120,000km입니다. 경부 고속도로 길이가 415.42㎞입니다. 경부고속도를 약 288.8개를 이어놓은 거리입니다. 지구 한 바퀴가 40,000 km입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핏줄로 지구를 세 바퀴를 감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 13,000개의 부품이 필요합니다. 747제트 여객기를 만드는 데에 3,000,000개의 부속품이 필요합니다. 우주왕복선을 만드는 데에는 5,000,000개의 부속품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10조 개의 세포 조직이 있습니다. 25조개의 적혈구가 있습니다. 25조개의 백혈구가 있습니다.
인체는 정말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인체를 소우주라고 합니다. 인체를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신비롭습니다. 지금부터 3000년 전에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139:13-14>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장을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태에서 자신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음받은 자신이 심히 기묘하다고 했습니다. ‘심히 기묘하심’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신묘막측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 뜻은 ‘경이롭게 만들다, 깜짝 놀라게 만들다,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하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신묘막측하게 만드셨습니다. 인체는 신비롭습니다. 인체는 소우주와 같습니다. 그런데 더 신비로운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주 깊이 새겨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무엇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육적 창조로 보는 견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몸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육적 창조와 영적 창조를 모두 포함한다는 견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영까지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거듭남이라는 견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재창조로 보는 견해입니다. 세 가지 모두가 다 맞는 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을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바’라는 말은 하나님의 재창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2:1, 5, 8-9>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이 말을 한 다음 바울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바’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이 새 창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바울은 ‘만드신바’라는 말에 헬라어 포이에마(φοίημα)라는 헬라어를 쓰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딱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포이에마는 ‘만들어진 것, 작품, 걸작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we are God's workmanship)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솜씨라는 말에 workmanship이라는 영어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workmanship이라는 단어는 ‘각고의 노력으로 만든 작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노력이나 노고가 0.00001%도 없습니다. 내 수고가 전혀 없습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한 마디로 공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가치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헬라어 포이에마라는 말에서 영어의 poem(시)라는 말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사람의 몸이 신묘막측하다면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환영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과거는 우리를 사로잡고 마비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결국엔 그들의 인생을 짓밟아 버리고 맙니다. 사단의 많은 반그리스도인적인 궤계 가운데 과거를 계속하여 되새기게 하는 전술이 있습니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며 우리를 자신 속으로 몰두하게 만들다가 죄책감과 부끄러움 속에서 마비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사단이 우리 앞에 우리의 과거를 플래카드 걸 듯 내 비칠 때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자기 서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사탄이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 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리고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다 적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 줍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했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 묻습니다. 루터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 너 이 죄 값은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는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루터는 새 힘을 얻어 “사탄아 물러가라”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그때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았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를 참소합니다. 우리를 고발합니다. 마귀가 물귀신처럼 우리의 과거를 잡고 늘어질 때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시고 마귀를 주의 이름으로 이깁시다. 우리는 다시 창조된 새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답고 놀라운 작품입니다.
2. 선한 일을 위하여 새 창조된 시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한 일’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지음 받은 이유는 ‘선한 일’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선!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선일까요? 아닙니다.
착한 아이 증후군(Good boy syndrom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도 합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키울 때 말을 잘 들으면 ‘아유 우리 아기 착해’라고 하며 안아주고 쓰다듬어 줍니다. 예뻐해 주는 거죠. 그러면 아이들은 ‘아! 착하면 사랑받는구나! 착한 것은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사랑받기 위해 부모가 착하다고 하는 행동을 해요. 착해 보이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하는 거예요. 싫은 것도 좋다고 해요. 참지 않아도 되는 것을 참아요. 억울한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해요. 이런 아이들을 보고 어른들은 계속 착하다고 해요. 애들 갖지 않다고 해요.
아이는 계속 감정을 억누르며 지나치게 착하게 사는 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착한 아이 증후군이 됩니다. 어른이 되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심한 경우에 신경증, 불면증, 우울증, 무기력증을 동반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참고 참다 어느 순간 꽝! 하고 터집니다. 여러분! 이것은 착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착하다는 말로 옭아매지 마세요. 자기감정에 충실한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착함, 선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좋은 것도 좋고 싫은 것도 좋다고 하는 것이 선이 아닙니다. 선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셨을 때에 계획되어지고 의도되어진 원래 목적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선하신 일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다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아주 다양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선 온유 절제 등등 선한 일은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행해야 할 선한 일이 또 있을 것입니다. 그 선한 일은 아주 다양할 것입니다. 그 선한 일을 하세요.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하는 가장 기본적인 선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소요리문답(기독교 교리 요약 질문) 첫 번째 질문이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인가?”입니다. 이 질문에 소요리문답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추구하세요.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위치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선한 일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세요.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일을 위해서 삽니다.
여기 난이 있습니다. 지난 2월 첫째 주에 화원에 갔습니다. 화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난이 눈에 뜨여요. 사장님에게 “이 난이 얼마나 갈까요?”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2개월 정도 갑니다.” 그래요. 가져와서 열심히 가꿨습니다. 그랬더니 아직까지 피고 있어요. 이번 주까지 19주째 피고 있습니다. 이 난을 돌보기 위해 난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난이 꽃을 피우기 위해 파란 잎 사이에서 꽃대를 올립니다. 꽃대가 60cm가 넘어요. 꽃대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꽃만 피웁니다. 아주 열심히 꽃을 피웁니다.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꽃을 피웁니다. 난에게 선은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교회 현관 밖 창틀 위에 다육이가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교회에 갔다가 놓았어요. 양지 바른 곳에 놓고 물을 잘 주었어요. 봄이 됐는데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해요. 붉은 색 꽃봉오리도 예쁘게 졌어요. 꽃이 피길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꽃봉오리가 아주 조금 벌어졌어요. 자주색 빛이 나는 붉은 색 꽃잎이 살짝 보여요. 얼마나 예쁜지! 그런데 해가 지니까 꽃봉오리가 닫힌 거예요. 아침이 되면 다시 필거라는 생각에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안 피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그게 다예요. 꽃을 피우기 위해 꽃대가 계속 올라왔어요. 그러더니 몇 시간 동안 살짝 피고 말았어요. 어느 날 보니까 꽃대가 말랐어요. 그게 다예요. 아주 조그만 몸통을 가지고 있어요. 몸통은 2-3센치 밖에 안되는데 꽃대는 15cm 이상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꽃을 살짝 피우고 집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꽃대를 계속 올리는 거예요. 식물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을 위해 꽃대를 계속 올립니다.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선을 추구하며 삽니다.
바버라 브래들리 해거티가 쓴 『인생의 재발견 - 마흔 이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버라 브래들리 해거티는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행복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 책에서 이 행복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의미를 추구해가는 가운데 얻는 장기적인 행복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 몸은 자기중심적 쾌락보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얻은 금욕적 충족감을 선호한다는 점입니다.
오래 가는 인간관계 등 내적 목표를 추구하는 그룹과 부와 외모, 명성 등 외적 목표를 추구하는 그룹으로 나누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외적 목표를 달성한 그룹은 수치나 분노 같은 감정적 문제와 기력부족 등의 신체적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반면 내적 목표를 추구한 그룹은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고 긍정적이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단기적인 행복을 쫓는 것보다 우리 몸에 더 났다는 결론입니다. 그 이유는 삶의 의미를 찾아 소명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위협을 덜 느끼고 결과적으로 싸우거나 도망칠 필요가 적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자기중심적 행복을 중시하면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위협당한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여기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와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은 행복이 자신의 욕구에 기인하지 않고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에서 비롯되기에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별로 위협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서 주신 원래의 선을 추구합시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을 찾읍시다. 그리고 그 선을 추구하며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이것을 추구할 때 우리 삶의 참된 보람과 가치가 있습니다.
3. 창세 전에 선한 일을 예비하신 하나님
이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전부터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비’라는 말이 KJV에는 ordai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ordain은 ‘(운명을) 정하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운명이 선한 일을 위해 정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을 위한 우리의 운명이 언제 정해졌습니까? 그것은 ‘창세 전’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천지창조 이전입니다. 세상 만물이 아직 생기기 전입니다. 물론 우리도 아직 지음 받기 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음받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도록 계획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즉 선한 일을 위해 우리의 운명을 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은 아닙니다. 선택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예정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섭리하십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준비하신 하나님을 추구하며 선한 삶을 삽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죄로 그 선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지으셨습니다. 다시 지으신 이유는 인간을 향한 본연의 선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선을 추구하며 삽니다. 여기에 우리의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1992년에 죽은 바이올리니스트 프릿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늘 자신이 사용하던 바이올린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최상의 바이올린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선활동을 많이 해서 모아둔 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여행시에 꿈에 그리던 바이올린을 발견합니다. 1700년 만들어진 것으로 모든 바이올리니스트가 꿈꾸는 현시가 30, 40억이 넘는 최고의 명기(名器)입니다. 그러나 크라이슬러는 가진 돈이 없어서 주인에게 다시 와서 사겠다며 팔지 말아 달라도 부탁합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어느 영국 수집가에게 팔린 상태였습니다.
크라이슬러는 포기하지 않고 그 영국 수집가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간곡히 부탁했지만 자신의 컬렉션 목록에 들어가서 팔 수 없다는 답변을 듣습니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크라이슬러는 한 가지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컬렉션 한다고 하셨지요? 이 악기가 컬렉션 되어 침묵하기 전에 한번만 연주하게 해 주십시오.”
크라이슬러는 10분 동안 신들린 듯한 연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연주를 듣고 있던 수집가는 표정이 바뀝니다. 그리곤 연주가 끝나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 바이올린의 진정한 주인이셨군요.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서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거저 주었다고 합니다.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명연주가 크라이슬러의 손에 들려 졌을 때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주인의 손 안에 있지 않은 것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지 않은 사람도 잃어 버려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삶의 최상의 노래를 낼 때는 바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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