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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 5월 15일 가정의 날 그리고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그래서 5월에는 휴일이 많습니다. 요즘은 학교장 재량으로 휴일을 정할 수 있어서 샌드위치 데이는 연휴로 만들어 3-4일씩 쉬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휴가 많아요. 연휴가 많아서 좋으시죠? 그런데 연휴가 많다보니 생활이 흐트러지기 쉬운 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삶도 신앙도 흐트러지기 쉬운 때가 5월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가정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저는 모니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집 거실 한 가운데에 텔레비전이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아예 집 중앙에 텔레비전을 놓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방에는 컴퓨터가 있습니다. 식구 수대로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는 넷북 노트북도 있습니다. 집 안에서 식구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 보느라 바쁩니다. 우리나라 가정의 중심은 모니터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가정에는 컴퓨터나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컴퓨터는 학교나 도서관에서 이용합니다.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텔레비전은 전시용입니다. 거의 사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식구들을 멀어지게 하는 매체를 집에 두지 않습니다. 대신 책, 잡지, 신문 등이 있습니다. 집에서 가족 토론, 이야기, 가족 오락을 합니다. 유대인의 자녀들은 세상에 자기 집처럼 좋은 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정에서 사는 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가장 큰 축복이 있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창세기 25:27에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막에 거하니’라는 말이 성경 히브리어로 ‘장막에서 길러진 자’란 뜻입니다. 장막은 성막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말입니다. 야곱이 장막에 거했다는 말은 가정이라고 불리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가정교육의 근거가 되는 성경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가정 중심에는 토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을 이스라엘의 4대 족장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4대 족장 중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 대한 간단하지만 아주 강렬한 언급입니다. 이 족장들 가정에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1. 믿음으로 예언
먼저 족장들의 가정에는 자녀의 미래에 대해 믿음으로 예언이 있었습니다. 족장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이 축복은 예언적이었습니다.
<히브리서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들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삭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때문입니다.
<창세기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계시를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내를 위해 기도합니다.
<창세기25: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태중에서 싸우는 거예요. 얼마나 싸웠는지 리브가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리브가가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창세기25: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이 때 주신 말씀이 바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태중에 있는 아이의 미래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나님의 계시로 알았습니다. 그 계시는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축복도 예언적입니다. 야곱이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을 부릅니다. 야곱은 큰 손자 므낫세에게 왼손을, 작은 손자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올리고 축복을 했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 손을 큰 아들에게 그리고 왼손을 작은 아들에게로 옮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대로 축복합니다.
<창48:19-20>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야곱은 ‘나도 안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합니다. 야곱은 두 손자에 대한 깊은 영적 통찰이 있었습니다. 두 손자에 대한 영적 통찰이 하루아침에 생겼을까요? 손자들에 대한 깊은 묵상과 기도가 있지 않았을까요? 야곱은 그 통찰력으로 두 손자에 대한 미래를 선포합니다.
이삭과 야곱의 축복은 후손들의 장래에 대한 선포입니다. 또 후손들이 이 땅에서 차지할 기업에 대한 공언입니다. 이 축복은 예언적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예언은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이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버지로서 아이들에 대한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아이들을 위해서 매일 같이 기도를 합니다. 또 우리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서도 매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기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내 기도가 그냥 맹목적인 기도가 아닐까?’ ‘그냥 추상적인 기도가 아닌가?’ 또 ‘의무적인 기도가 아닐까?’ ‘아니면 욕심이 가득한 기도가 아닐까?’ 이런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깊은 기도를 할 수 없을까? 아이들의 미래를 놓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없을까?’
이삭과 야곱의 축복이 예언적이었던 것은 축복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영적 통찰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족장들처럼 깊은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또 자기 자녀들의 장래를 예고할 정도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우리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예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으로 예언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부모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리고 특권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에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습니다. 족장들의 가정처럼 오늘 우리 가정에 예언의 말씀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2. 믿음으로 축복
이삭과 야곱의 축복은 믿음으로 한 축복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족장들의 축복기도를 보면 그 스케일이 정말 웅대합니다. ‘만민아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 족장들이 아들을 축복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사둔 무덤에 묻힐 판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나안 땅을 차지할 만한 어떤 조그마한 조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삭은 야곱에게 웅대한 축복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삭이 웅대하게 자기 아들 야곱을 축복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이런 웅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그 약속을 믿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 아들에게 축복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축복했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했습니다.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왜 야곱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했을까요? 야곱의 아들은 열둘입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12명의 아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12명의 아들에게 축복하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먼저 축복합니다. 요셉의 아들은 야곱에게 손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아들 보다 손자를 먼저 축복한 것입니다. 야곱은 왜 손자들에게 먼저 축복을 했을까요? 그것은 요셉이 야곱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역대상5:1-2>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요셉의 아들은 둘입니다. 손자 둘에게 하나씩 주었다는 것은 아들에 둘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족장 시대에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었습니다. 두 몫을 받는 아들이 아버지의 진정한 상속자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으로 요셉에게 두 몫을 주었습니다. 야곱의 상속자는 요셉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야곱이 요셉의 아들을 축복할 때도 야곱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왔습니다. 요셉의 아들들의 축복은 요셉의 몫입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없지만 요셉은 애굽의 총리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축복기도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는 것이 더 권위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했습니다. 게다가 야곱의 아들과 야곱의 손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리라는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있다면 오직 말씀뿐입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올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46:3-4>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이 요셉의 아들을 축복할 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잡히는 것, 보이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과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과 야곱이 믿음으로 축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족장들의 축복기도는 고무풍선처럼 보입니다. 외적인 모습이나 조건을 볼 때 족장들의 축복기도는 공허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축복할 때 그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축복할 때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족장들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웅대한 축복을 그 자손들에게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합니다. 딸들에게는 “사라처럼 리브가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합니다. 아들들에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합니다. 유대인의 축복은 이삭 야곱 때부터 지금까지 약 4천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축복은 자녀들에 대한 우리 부모들의 특권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를 위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삭과 야곱처럼 축복합시다.
아주 오래 전에 방송으로 분당 어떤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집회 중에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차를 끌고 나가 사고를 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학생입니다. 당연히 면허가 없을 때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이동원 목사님이 모든 집회를 취소했다고 합니다. 몇 달 동안 여러 교회에 집회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집회를 다 취소한 거예요. 그리고 바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집에 갔더니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요. 아들이 아버지가 온 것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 아빠는 항상 나를 축복하셨는데 지금도 나를 축복하실 수 있나요?”
그러자 그 목사님은 아들을 부둥켜 앉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 나는 여전히 너를 축복한단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했답니다. 그 목사님은 불안에 떠는 아들을 위해서 모든 집회를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사고로 불안해하는 아들을 위해서 축복했습니다.
2-3주 전입니다 교회 앞 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엄마가 초등학생 1-2학년 정도 돼 보이는 아이에게 막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언뜻 들어보니까 아들이 말을 잘 안들은 것 같아요. 아이들 키우기가 정말 힘들잖아요. 아들은 딸 보다 더 힘들잖아요.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차,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시간인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막 혼내고 있는 거예요. 혼내는 엄마 모습을 보며 문득 먹잇감을 앞에 놓고 포효하는 사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이가 주눅이 들어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예요. 그냥 소리만 지르는 것이 아니라 육두문자가 막 날아가요. 육두문자는 저주잖아요. 자기가 낳은 자식이잖아요. 그런데 저주를 하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요.
여러분! 부모는 언제 어느 때가 자녀를 위해서 축복을 해야 합니다. 축복은 부모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제가 다른 집 아이를 축복해보세요. 사람들은 당신이 뭔데 축복하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자녀들을 축복하는 것은 아무도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특권을 사용합시다. 저주는 안됩니다. 딸들을 향해서는 “사라와 리브가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합시다. 아들들을 향해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합시다. 여러분의 가정이 믿음으로 하는 축복이 있는 바랍니다.
3. 믿음으로 유언
마지막으로 족장들의 가문에는 믿음의 유언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축복을 하고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창세기 47장 31절에는 침상 머리에서 경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지팡이와 침상이란 단어가 자음이 똑같습니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둘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야곱은 침상을 떠나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했거나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늙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팡이를 의지하면서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몸은 늙었지만 신앙은 결코 늙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손자들에게 축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틀림없이 야곱은 손자들에게 축복하기 전에도 묵상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살았습니다. 야곱은 죽을 때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에도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또한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것은 창세기의 요셉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근으로 애굽에 들어와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죽고 약 35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갈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했습니다. 왜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했을까요? 가나안 땅 명당에 묻히고 싶어서요. 아닙니다. 애굽 땅은 살기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곳은 애굽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사는 소망의 민족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해골을 이스라엘의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을 바라보며 사는 소망의 민족이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영적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우리는 애굽에서 끝날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가나안인 천국이 있습니다. 가나안을 바라보며 삽시다. 요셉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유언할 수 있었습니다. 족장들의 가문에는 믿음으로 한 유언이 있습니다. 솔론이라는 사람은 ‘진정한 축복은 훌륭한 삶과 행복한 죽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노는 날이 많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믿음의 예언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축복, 믿음의 유언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야곱의 장막처럼 하나님의 성전이 되길 바랍니다. 가장 복된 믿음의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복음 메시지로 유명한 최권능 목사님이 1939년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평양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문할 때마다 최권능 목사님은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이 찬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5년간 투옥생활을 하다가 1944년 3월 1일부터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날 사모님과 자녀들이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면회를 왔습니다. “내가 금식 기도 작정한 것을 알고 마귀가 맛있는 음식으로 시험하는 군.”이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애들아, 집에 가서 날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금식기도 끝나는 4월 10일까지 누구도 면회 오지 말고 기도해다오. 미안하다. 땅 위에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인데 내가주님께 충성하다 보니 지나치게 가정과 너희들에게 등한히 하였구나. 하하, 이것도 육신의 생각이지.” 하더니 딸과 부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지켜 주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고 너희들도 나와 같이 저 천국에 가서 즐거이 살게 될 때 이 땅에서 못 받던 위로를 하늘나라에서 받자.” 그날 가족이 가지고 온 음식은 모두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를 강행하다가 병으로 쓰러지자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목사님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1944년 4월 15일 오후 12시 40분. 평소에 그를 아끼고 따르던 교우들과 부인, 자녀들이 최권능 목사님의 병실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찬송이 끝남과 함께 미소를 남기고 최 목사님은 운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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