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큰 노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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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5:28~31
주일오전예배 | 2017-04-2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여러분!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대답하기 어려우신가요? 우리들이 쉽게 행복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깨에 메고 있는 무거운 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매일 같이 반복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지루한 일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나를 찾는 길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저자 김광수 씨는 아무런 생각 없이 7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직장을 잘 다니는 아들, 일 잘하는 직원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물었습니다. “넌 지금 행복하니?” 갑작스러운 친구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던 김광수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찾았습니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미국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4,285Km가 넘는 극한의 트레킹 코스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산과 가장 뜨거운 사막을 지나야 합니다. 곰과 같은 맹수가 나오기도 합니다. 김광수씨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300km의 길고긴 산길을 걸으며 행복에 관한 답을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배낭을 메고 5개월간 걷고 또 걸으면서 김 씨가 얻은 해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소중함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앞으로의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이 질문에 즉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지금 내 삶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변화도 없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이 답답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세요. 지금 내가 진 무거운 짐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매일의 일상이 쌓고 쌓여 우리를 앞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창세기 5장은 읽다가 보면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입니다. 별 특이한 내용이 없이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한 일이 수백 년 동안 아이를 낳은 것 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800, 그 아들 셋은 807, 그 아들 에노스는 815년 동안 아이만 낳았습니다. 반복해서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겹지 않았을까? 800년 동안 애만 낳다니아담부터 라멕까지 9대인데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눈에 지루할지 몰라도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전진했습니다. 이 시간에 아담의 9대손 라멕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1.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다

 

라멕은 므두셀라의 아들입니다. 창세기 4장에도 라멕이 나옵니다. 동명이인입니다. 그 라멕은 므두사엘의 아들입니다(4:18). 아버지 이름이 비슷합니다. 므두사엘의 아들 라멕은 아주 흉악한 살인자입니다. 반면에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은 에녹의 계보를 잇는 아주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 라멕은 크게 두 가지 아픔을 겪었습니다. 첫째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픔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습니다. 셋은 아담의 첫 아들이 아닙니다. 아담은 이미 가인과 아벨을 낳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130세 훨씬 이전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습니다.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습니다.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아이를 아주 늦게 낳았습니다. 라멕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노역의 고통입니다. 라멕은 먹고 살기가 아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이라는 부분을 성경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 일에서부터, 우리 손의 수고스러운 노역으로부터, 땅에서부터

 

라멕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멕은 땅에서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동일하게 겪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결론을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는 비유로 내리셨습니다. 이 비유에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집이 나옵니다. 모레 위에 세운 집과 반석 위에 세운 집입니다. 모레 위에 세운 집과 반석 위에 세운 집에 시험이 찾아옵니다. 두 집이 당하는 시험이 똑같습니다.

 

<마태복음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태복음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반석 위에 세운 집이나 모레 위에 세운 집이나 시험이 똑같이 찾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시험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시험은 신자에게도 있고 불신자에게도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고 기도를 적게 하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그리고 불신자에게까지 시험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찾아옵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이 땅에서 동일한 시험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창세기 5장은 믿음의 계보입니다. 이 계보는 메시야의 계보로 이어지는 아주 중요한 계보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조상들이 아이를 잘 낳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첫 출산을 합니다. 에녹의 아버지 야렛은 162세에 첫 출산을 합니다. 여러분! 이 땅 위에서는 신자나 불신자는 동일한 아픔과 시험이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마크 빅터 한센이라는 사람이 멘토의 수첩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제를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한 평도 안되는 좁은 공간에 눕는 순간 모든 문제는 우리에게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켄 블랜타드는 리더의 심장에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문제가 없는 것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든 걱정거리나 문제가 있다. 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는 다를 수도 있지만 똑같은 문제를 안고도 어떤 사람은 자살을 하고 어떤 사람은 해결해낸다.’

 

2. 큰 노아를 기다리며

 

라멕은 노역과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82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로 인해 위로받기를 소원합니다. 노아는 안식, 휴식, 위로라는 뜻입니다.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고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식으로 위로받고 삽니다. 자식 때문에 일합니다. 자식 때문에 참습니다. 저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자식 때문에 참고 견딘 것이 많아요. 그러면 자식이 진정한 위로가 될까요? 아닙니다. 자식이 주는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담이 자식 때문에 아픈 적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나 주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한 마디로 여자의 후손이 원수를 갚아줄 것이라고 약속입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가인입니다. 인류 역사 최초의 출산입니다. 인류 최초의 아기입니다. 처음 보는 아기예요.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낳고 얼마나 좋았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죽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아들이 뱀에게 원수를 갚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담과 하와를 더 아프게 했습니다. 라멕은 이 스토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라멕은 약 56년 정도를 아담과 같이 살았습니다. 라멕은 아들 노아가 진정한 위로자가 아닌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라멕은 아들 노아를 가리켜 이 자’(this one)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아들’(29)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은 이 아들이 아니라 이 자’(this one)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자’(this one)가 누굴까요? ‘이 자’(this one)는 노아의 후손을 통해 이 땅에 나타날 큰 노아입니다.

 

여러분! 때로 자식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세요. 하나님께서 삶 속에서 주시는 노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는 노아가 다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해요. 눈에 보이는 노아 뒤에 큰 노아가 있습니다. 노아 뒤에 있는 큰 노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큰 노아, 큰 위로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라멕은 노아를 시작으로 595년 동안 자식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 10대가 나옵니다. 노아를 빼 놓고 9명이 각각 몇 년 동안 자식을 낳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800(130), 셋은 807(105), 에노스 815(90), 게난은 840(70), 마할랄렐은 830(65), 야렛은 800(162), 에녹은 300(65), 므두셀라는 782(187), 라멕은 595(182)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자식을 낳은 연수를 합치면 모두 합하면 6,569년입니다. 6,569년 동안 믿음의 조상들이 계속 자식만 낳았습니다.

 

연도를 계산해보면 아담이 874세 때 라멕이 태어났습니다. 아담이 930세를 살았으니까 56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9대가 함께 살은 거예요. 한 사람이 8-900년 동안 매일 똑같은 사람들하고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은 거예요. 얼마나 지겨웠을까요?

 

그런데 성경 기자는 왜 이것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노아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대대로 천년 가까운 시간을 살며 그 삶 속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쌓고 또 쌓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삶에 노아가 나타날 때까지입니다. 노아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은혜를 쌓은 것입니다.

 

독일에 헤른후트란 곳이 있습니다. 헤른후트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거주한 곳입니다. 1517년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카톨릭에서 반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카톨릭이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인구의 1/2이 죽었습니다. 보헤미아와 체코의 모라비아에서 신앙 때문에 독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피한 곳은 진젤돌프 백작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진젤돌프는 자신의 영지에 헤른후트를 세웁니다. 헤른후트는 주님의 망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젠돌프 백작은 거기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1727813일 모라비안 교회가 창립됩니다. 여기에서 모라비안주의(Moravianism)가 잉태되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이 곳에 거주하면서 ‘100년 동안의 24시간 기도운동을 펼쳤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100년 동안 기도 릴레이를 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100년 동안의 기도 릴레이가 세계 교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모라비안 기도 모임에서 요한 웨슬레가 회심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철저한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매일 한 두 시간씩 꼭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써 지켰고, 매주 성찬식에 참석하였다. 말에나 행실에나 단 한 번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언제나 조심하였다.’

 

웨슬리는 옥스퍼트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생활을 했습니다.

 

4시부터 5시까지 명상과 기도

5시부터 7시까지 성경

8시부터 9시까지 기도회

9시부터 12시까지 성경 연구

12시부터 1시 까지 간증 시간

2시부터 4시 까지 전도

4시부터 5시 까지 저녁 기도회

5시부터 6시까지 명상과 기도

6시부터 7시까지 성경

7시부터 8시까지 저녁 예배

8시부터 9시까지 설교

 

그런데 마음에 회심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한 웨슬리는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마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디안들을 건지기 위해 나는 미국으로 왔다. ~~그러나 나는 누가 건질까. 이 믿지 않는 마음에서 나를 건져 줄자가 누구냐!!” 결국 웨슬리는 아메리카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옵니다.

 

1738524일 저녁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내키지 않은 기도 모임이었습니다. 설교자가 흘런드라는 페인트 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웨슬리는 그날 읽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녁 915분전쯤,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더워짐을 느꼈다.” 인간의 강팍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기도입니다.

 

여기서 변화된 웨슬리는 영국교회를 부흥시킵니다. 그리고 웨슬레가 감리교를 창시합니다. 미국 교회의 부흥운동이 소수의 모라비안 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감리교에서 성결교가 시작됩니다. 미국의 부흥이 20세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100년 동안의 기도가 복음을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로 가게 했습니다. 그 복음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100년 동안 36524시간 기도 릴레이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유언을 이루고 있습니다.

 

브라질 싼 파울에 가면 <데오르 디 아모르 교회>가 있습니다. 미린다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100만 명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 한쪽 벽면에 목발들이 걸려있습니다. 목발을 집고 교회에 온 사람들이 예배 중에 고침 받고 버리고 간 목발이랍니다. 그것을 기념으로 벽에 걸어놓았습니다.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기도의 힘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136524시간 항상 예배가 있습니다. 기도와 예배가 끊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낮에 가도 예배가 있습니다. 밤에 가도 예배가 있습니다. 새벽 1시에 가도 예배가 있습니다. 1365일 항상 기도하고 항상 예배합니다. 찬송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큰 노아가 올 때까지 믿음의 길을 계속 갑시다. 계속 은혜를 쌓고 또 쌉시다. 큰 노아가 올 때까지.

 

3. 777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명은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10명 중에 7명은 900세를 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3명만이 900세를 못 살았습니다. 마할랄렐은 895, 라멕은 777세 그리고 에녹은 365세를 살았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을 빼면 10명 중 라멕이 가장 짧게 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거의 200년 가까이 적게 살았습니다. 200년 정도를 적게 살았기 때문에 억울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짧게 살았지만 라멕의 삶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습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감추심을 받았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은 아담이 창조된 후 1656년에 있었습니다. 라멕은 노아 홍수 5년 전이 1651년에 죽습니다. 홍수 직전에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라멕의 영혼을 홍수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7: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라멕은 홍수 직전에 하나님의 손길로 감추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는 시험을 동일하게 받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적게 하는 사람이나 시험이 동일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시험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라멕의 아버지 므두셀라가 생각이 났습니다. 므두셀라는 1656년 노아 홍수가 있던 해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라멕은 자기 아버지 므두셀라 보다 5년이나 먼저 죽은 것이 됩니다. 므두셀라는 아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므두셀라는 아들의 죽음을 보며 아주 괴로웠을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괴로움과 슬픔이 다였을까요? 아닙니다.

 

므두셀라는 자기가 죽으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손자 노아가 방주를 건조 중에 있든지 아니면 건조를 끝냈을 때입니다. 점점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 가족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는 노아 홍수 전까지 자녀를 낳았습니다. 큰 아들인 라멕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자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자손들 사이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므두셀라는 자기 자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제외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보다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는 자기 자손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보다 자기 자손들이 하나 둘씩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자손들의 죽음은 므두셀라에게 아픔이며 가시이었습니다. 하지만 홍수 심판 전에 자기 백성들을 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지금 당하고 있는 아픔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기 망설여지시나요?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짐 때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당하고 있는 아픔은 단순한 아픔이 아닙니다. 그냥 가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 가시가 우리 마음을 찔러 피가 날찌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아픔을 당하며 믿음의 길을 계속 갔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길을 계속 갑시다. 중단하지 맙시다. 그리고 은혜를 쌉시다.

 

<시편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우리 중단하지 말고 계속 갑시다. 그리고 은혜를 쌓고 또 쌉시다. 우리 삶에 큰 노아가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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