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무덤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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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20:1~10
주일오전예배 | 2017-04-1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공관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사람을 개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밤에 니고데모(3)가 예수님을 혼자 찾아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은 혼자 만나십니다(4). 베데스다 연못가의 많은 병자들 중에 38년 된 병자 한 사람만 만나십니다(5). 또 맹인인 거지 한 명을 만나십니다(9). ‘1:1’ 이것이 요한복음이 가진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특별히 다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특히 사랑하셨습니다.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나사로라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그 누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와 누이 동생들도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함께 만나지 않으십니다. 각각 한 사람씩 밖에서 만나십니다. 그것도 마을 밖에서 만나십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스토리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도 자세히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십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자신을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사랑하시는 그 제가가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사랑했습니다. 요한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랑의 마음을 특별히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해 가진 마음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1. 무덤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저는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무덤의 여인좀 끔찍한 가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이 말 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더 잘 표현한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갈 때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이 마가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16:1-2>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세 여인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또한 여러 명이 함께 갔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간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열 두번 나옵니다. 1번이 회심할 때입니다. 두 번은 부활을 증언할 때입니다. 세 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입니다. 나머지 여섯 번이 예수님의 무덤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열 두 번 중 열 한번이 예수님의 무덤, 죽음, 부활과 관련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최후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장사 지낼 때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바라보며 끝까지 앉아 있었습니다.

 

<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리고 장사된 지 사흘 후에 새벽에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확인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신이 없음에도 제자들처럼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남아 그냥 울고 있었습니다. 시신이 없음에도 제자들처럼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없는데도 무덤 밖에서 그냥 울고 서 있었습니다. ‘무덤의 여인 마리아마리아의 이런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깊은 사랑을 보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남들 보다 더 많이 사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일곱 귀신을 쫓아내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일곱 귀신 들린 마리아, 얼마나 그 삶의 모습이 끔찍했는지 상상이 가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리아가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회심 이후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는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만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만큼 예수님께 사랑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빚진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2. 무덤으로 달려가는 남자들

 

마리아는 무덤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두 사람에게 무덤에 예수님이 없다고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급히 달려갑니다. 두 사람은 무덤을 향해 전력을 다해 정신없이 달려간 것 같습니다.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두 사람이 같이 뛰어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베드로 보다 더 빨리 뛰어갔습니다. ‘더 빨리 달려가서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더 빨리 달아나서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에 NIVKJVoutrun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outrun보다 멀리 달리다’, ‘보다 빨리 달리다’, ‘에서 도망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도망치듯 정신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마치 육상 선수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뛰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습니다. 상황이 다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새벽입니다. 할 일이 없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도 됩니다. 아니면 두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같이 뛰어가도 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보조를 맞추지도 않고 정신없이 무덤을 향해 뛰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무덤에 예수님이 없다는 말에 아주 조그만 소망의 빛을 발견한 것 아닐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제자들에게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달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집을 받쳤습니다. 자기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은 정말 신이 나는 일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 왕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는 호산나’ ‘왕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인기가 최고조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절망입니다. 제자들에게 멘붕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제자들은 아주 조그만 소망의 빛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은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으면 사흘만에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27:62-63>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부활에 대한 아련한 소망의 빛 때문에 두 사람은 정신없이 달리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아직 부활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음에 틀림없습니다.

 

<11: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 다른 제자는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자리를 본 후에 요한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11: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부활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부활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두 사람이 무덤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갑니다. 요한복음은 두 사람이 왜 뛰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뛰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두 사람처럼 무덤을 향해 정신없이 뛰는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가 잘 아는 동화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을 아시죠? 거북이가 이겼습니다. 실제로도 거북이가 이기는지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거북이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거북이와 토끼는 자기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는지 알까?’ 그냥 막연히 달리고 있는 아닐까요?

 

경마장에 가면 말이 경주를 합니다.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기수가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을 합니다. 그렇다면 말은 지금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을 알까요? 자기가 1등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까요? 자기가 3등이나 4등으로 들어온 것을 알까요?

 

마태복음에는 무덤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달음질하는 두 여인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돌아간 후에 일어났던 사건 같습니다. 두 여인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계시를 받습니다. 두 여인은 너무 흥분해서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갑니다.

 

<마태복음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여기 두 여인들은 왜 뛰는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두 제자와 두 여인의 뛰는 이유가 아주 대조적입니다. 두 제자는 뛰기는 뛰는 데 이유를 모릅니다. 하지만 두 여인은 뛰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저와 여러분의 부활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뛰어도 이유를 알고 뜁시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를 향해 뛰어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무덤에서 일어나신 주님

 

예수님의 무덤에 요한이 먼저 도착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올 때까지 무덤 입구에서 기다렸습니다. 왜 먼저 들어가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요한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았던 베드로에 대한 배려나 예의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입니다. 요한은 도착하자 무덤 입구에서 안을 살짝 살펴봅니다.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여기 보았으나라는 말은 힐끗 보았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무덤 입구에서 안을 힐끗 보았습니다. 잠시 후에 베드로가 도착했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여기 보니라는 말은 자세히 살펴보다’ ‘정밀하게 조사하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힐끗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머리를 쌌던 수건이 쌌던 그대로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몸을 세마포(고운 베)로 둘둘 감았습니다. 머리는 수건(수다리온)으로 둘둘 감았습니다. 아주 단단하게 감았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을 때 예수님께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풀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단단히 묶었습니다. ‘쌌던 대로 놓여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원래의 나선형 모양 그대로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때 머리를 둘둘 말은 수건을 풀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일어나셨습니다. 머리를 둘둘 말았던 수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건을 풀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잘라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일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에서 죽음과 같은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절망의 자리에 눕게 됩니다. 낙심의 자리가 있습니다. 절망 좌절 낙심 조롱 비웃음 자책 슬픔 아픔 괴로움 고통이라는 이 세상의 붕대가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꽁꽁 묶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여러분의 부활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 아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었던 고통의 붕대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와 메건 로이드 데이비스가 함께 쓴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유진 역, 푸른숲)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몇 글자 안 되는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겪은 절망이 그냥 느껴지는 책입니다.

 

여러분! <락트-> 증후군이라는 병을 들어보셨습니까? 락트-인 증후군은 우리말로 <감금증후군>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의식은 있지만 전신마비로 인하여 외부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뇌는 정상입니다. 그런데 뇌간이 상해 뇌와 몸이 대화가 안되는 병입니다. 그래서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감금증후군이었습니다.

 

마틴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목이 아파 조퇴하여 집에 왔는데 사지가 마비되더니 손발이 안으로 말려들어갔었습니다. 그리고 지능이 3개월이 된 아기와 같았고 그저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

 

마틴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습니다.

 

12살인데? 16살이라고 하는 거지?’

 

누워있는 동안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식물인간에서 4년 만에 의식은 돌아왔지만 외부의 자극에 반응할 수 없는 감금증후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틴이 의식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마틴을 짐작 취급을 하였습니다. 의사와 요양사에게는 그저 환자였고 일거리였습니다.

 

온갖 비아냥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고 성폭력까지 당했지만 감금증후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표현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수모도 다 견디기 힘들었지만 마틴이 제일 힘들었던 것은 부모님이 절망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루는 마틴의 얼굴을 닦아주던 마틴의 어머니는 울음 섞인 말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틴은 온 세상이 아득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9년을 보내고 마틴을 정말 살뜰히 간병해준 간병인 버나가 마틴이 의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여러 재활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의사소통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고 대학을 나와 어엿한 웹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보통 감금증후군인 환자들은 서서히 장기들은 제 기능을 못하고 결국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마틴은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난 케이스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입니다.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일어납시다. 그래서 부활의 새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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