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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도를 해주시면서 “아기 옷을 하나 사서 집에 걸어 놓고 이 옷을 입을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집사님은 목사님 말씀대로 예쁜 옷을 하나 사서 집에 걸어놓고 볼 때마다 매일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에 정말 아이가 생겼습니다. 집사님은 너무 기뻤습니다. 10개월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예쁜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에서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집안은 아들이 귀한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이왕 주시려면 아들을 주시지 하나님께서 딸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걸어놓고 기도한 옷이 여자 아이 옷입니까? 남자 아이 옷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보니 집에 걸려 있는 옷이 여자 아이 옷이었습니다. 웃자고 만들어 낸 이야기인지 정말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아니 바라보는 대로 됩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삶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땅의 것, 육의 것만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은 있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육적인 것 보다는 영적인 것, 이 땅의 것 보다는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1. 이것을 바라보라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게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14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장차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덕이 있습니다. 믿음, 사랑, 봉사, 섬김, 헌신, 배려 같은 것들입니다. 교회에서 강조하는 신앙의 덕목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두 가지로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 두 가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섬김, 배려는 사랑에 속합니다. 봉사와 헌신은 믿음에 속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뚝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봉사는 믿음의 요소가 있지만 사랑의 속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교회에서 강조하는 덕을 살펴보면 믿음 아니면 사랑으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기독교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신앙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 21권의 사도들의 편지를 쭉 읽어보면 세 가지 덕이 강조됩니다. 그것은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세 가지 덕 중 사랑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믿음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로마 교회에는 사랑이나 소망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상황에 믿음의 강조가 필요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소망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먼저 믿음과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망에 대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사랑보다 소망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상황에 맞게 사도들은 강조점을 갖고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전후서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소망을 강조한다고 해서 사랑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사랑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도들은 편지를 쓰면서 그 교회 상황에 따라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하나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가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 상황에서 더 필요한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소망을 강조한 이유는 성도들이 많은 핍박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모두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강조되는 것 중에 하나가 경제문제입니다. 누가 경제를 살릴 것인가? 이것이 핫이슈입니다. 우리 시대 먹고 사는 문제가 최고의 이슈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문제가 그대로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항상 땅의 문제 때문에 매일 울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땅의 문제가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도전합니다. 우리를 현실에만 묶어 두려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소망을 잃어버리면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열심히 삽시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도 가집시다. 그리고 날마다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시다.
2.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1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평강을 원합니다. 이 세상에 평안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매일 같이 평안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는 늘 네 가지의 평안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 삶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가정, 부모, 자녀, 하는 일들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가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사고 없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하기를 늘 기도합니다. 셋째, 성도들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가정 산업 범사가 평안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네 가지를 위해서 늘 기도하려고 애씁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도 평안을 원하지 않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평안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돈도 벌려고 하고 출세도 하려고 하고 집도 사려고 합니다. 뭔가를 많이 얻으면 평안할 것 같아서 사람들은 계속 뭔가를 얻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또 평안을 얻기 위해서 수련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상을 합니다. 도를 닦습니다. 하지만 평안을 얻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안을 얻으려고 하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사도는 평안을 얻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사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은 한 마디로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이 우리를 평안하게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점과 흠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번역 성경(공동번역성경과 표준새번역)은 점을 티라고 했습니다. 점이나 티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흠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여러분! 티도 없을 만큼 완전한 거룩한 생활이 가능할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흠도 티도 없는 거룩한 생활이 가능할까요?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일서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또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한 삶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왠지 모르는 불안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충분한 기도를 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또 기도가 되지 않을 때입니다. 기도를 잘 하지 못하면 불안해요. 왜 기도하지 못하면 평안이 깨질까요? 그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회복하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기도 중에 회개를 합니다. 내 마음을 아룁니다. 그래서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러면 다시 평안이 다시 찾아옵니다. 평안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진정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참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에 순박한 시골 농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 농부의 얼굴은 유난히도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로운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작곡가 하이든(18세기 중엽, 오스트리아)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많은 재능을 나타내었습니다. 모차르트, 헨델, 베토벤과 버금가는 음악가입니다.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50항목의 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유서 중에 한 구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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