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제자 삼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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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28:19-20
주일오전예배 | 2017-04-0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익뚜스(ἰχθύς)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헬라어로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익뚜스는 헬라어로 다섯 개의 철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다섯 글자가 예수("Ίησος), 그리스도(Χριστός), 하나님(Θεοῦ), 아들(Υός), 구원()(Σωτήρ")’라는 다섯 단어의 첫 글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문양이 고대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마크와 이정표로 사용었습니다. 아마 한 번쯤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고기를 기독교인들이 마크로 사용한 이유는 예수님의 그물 비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13:47-48>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하묘지에 숨어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고기 문양을 예배 장소를 가리키는 이정표로 사용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표시로 사용했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 중에 한 사람이 물고기 모양의 윗부분을 땅에 그리면 다른 한 사람이 물고기 아래 부분을 그렸습니다. 물고기 그림으로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표시는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 물고기 표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했습니다. 고난의 시대이었습니다. 이 표시를 함께 그리며 동질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6절에 열 한 제가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열 한 제자에게만 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승천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에도 같은 사건이 있습니다(14~20). 이 때에도 열한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모습을 몇 명이 보았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 여러 곳을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 외에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열 한 제자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네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라

 

예수님의 첫 번째 명령은 가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마가복음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또 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오는 신앙만 있으면 안됩니다. 세상으로 가는 신앙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말의 뜻은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면 여기를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커피숍이 들어오면 커피숍이 됩니다. 서점이 들어오면 서점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서 교회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전용 비행기를 에어포스원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어떤 영화를 봤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예기치 않는 일로 전용기가 아니라 다른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조종사가 이제부터 이 비행기가 에어포스원이다.’라고 송신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타는 비행기가 에어포스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사는 곳을 청와대라고 합니다. 지붕이 푸른색이라 청와대입니다. 그러면 지붕이 푸른색이면 다 청와대입니까? 대통령이 있어야 청와대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사는 곳을 백악관이라고 합니다. 집이 흰색이라 백악관(White House)입니다. 그러면 하얀 집이면 다 백악관입니까? 미국 대통령이 있어야 백악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교회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집으로 가면 집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직장으로 가면 직장이 교회입니다. 내가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가는 신앙,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사명 의식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의 생명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는 신앙과 가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은 다시 세상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2. 제자 삼으라

 

둘째,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사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지식이나 덕을 갖춘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덕을 배우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지식에 따른 제자가 있습니다. 덕에 따른 제자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믿음에 따른 제자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첫째, 지식에 따른 제자가 있습니다. 위키백과사전에서 학교에 대해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학교(學校)는 교육을 위한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교실과 칠판 등 교육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여러 학생들이 교사의 지도에 따라 지식을 얻는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또 특정 기능을 가르치는 곳도 학교로 불린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학교는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학교는 지식의 제자를 만드는 곳입니다. 학교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정의하는 학교는 이렇습니다. 학교는 지식 또는 기술에 따른 제자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둘째, 덕 혹은 사상에 따른 제자가 있습니다. 공자(BC 551~BC 479)의 언행록인 <<논어>> 이인편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습니다. 덕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지식이 있는 사람 보다 덕이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덕이 있는 사람을 따릅니다. 또 사상이 있습니다. 공자는 학자이며 사상가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쌓아 자기들만의 사상체계를 만듭니다. 민주주의 공산주의 유학 등등 사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상에 따라 제자가 됩니다. 덕에 따른 제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상에 따른 제자가 있습니다.

 

셋째, 믿음에 따른 제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믿음을 가르치고 믿음을 전파하는 곳입니다. 교회를 학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믿음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믿음학교입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학교는 지식을 가르칩니다. 사상가는 사상을 가르칩니다. 교회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가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제자 삼아야 합니다. 지식의 제자가 아닙니다. 사상적인 제자가 아닙니다. 믿음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제자를 삼아야 할까요?

 

제가 그 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군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라는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신앙생활하던 교회의 집사님입니다. 그분은 새벽 2-3, 3-4시가 되면 교회에 오십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오십니다. 아예 교회에서 주무시기도 합니다. 기도를 7-8, 8-9시까지 혼자 남아 기도하십니다. 집사님께서 교회 예배실에 커다란 시계를 하나 기증하셨습니다. 화가 나거나 목사님께 서운한 일이 있으면 사다리를 가져와 시계를 떼려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이 말렸습니다. 집사님은 예수님 믿기 전에 무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격이 좀 특이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잘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습니다.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하고 기도 하셨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예배를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많은 신앙인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신앙인은 ○○○ 집사님입니다. 그 분이 기도하는 모습, 신앙생활시던 모습이 제 머리 속이 아니라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 집사님의 제자인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제자 삼으세요. 이 세상에서 믿음의 제자를 삼으세요. 친구, 직장 동료, 이웃을 믿음의 제자를 삼으세요.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여러분의 자녀라도 믿음의 제자를 삼으세요.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덕이나 지식의 무용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1:5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더하라고 했습니다. 덕은 하늘의 덕입니다. 지식은 하늘의 지식입니다. 믿음 위에 하늘의 지식과 하늘의 덕을 더합시다. 그래서 제자 삼읍시다. 이것이 주님의 두 번째 명령입니다.

 

3. 세례를 주라

 

세 번째 주님의 명령은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왜 계속에서 세례를 베풀어야 할까요?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담그다씻다입니다. 세례는 물에 담그고 물에 씻는 의식입니다. 세례를 물에 담근다라고 할 때 세례 받는 사람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물에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물에 씻다는 의미로 볼 때 죄씻음 또는 죄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물에 담그고 물에 씻는 의식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습니다. 이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세례를 주면 되나요? 이것으로 끝인가요?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모범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온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왔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책망을 받으면서 나왔습니다. 심지어 욕을 먹으면서 나왔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듣는 죄인들의 자리에 서서 함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자신과 자기 백성들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여러분! 세례는 동일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군에 가면 훈련소에서 6주 기본훈련을 받습니다. 지금은 5주로 바뀐 것 같아요. 기본훈련을 마치면 정식 군인이 됩니다. 그러면 부대를 배치 받습니다. 그런데 그 부대의 성격에 맞는 훈련을 더 시키는 부대가 있습니다. 강도가 좀 셉니다. 제가 배치 받은 부대도 자체훈련이 따로 있었습니다. 훈련을 마친 후에 부대 입단식이 있습니다. 입단식을 밤에 합니다. 입단식 중에 병사들은 부대의 깃발에 입을 맞춥니다. 입맞춤이 부대원과 동질의식과 자긍심을 갖게 합니다. 어떤 부대는 입단식 중에 그 부대 안에 있는 못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부대원이 되는 것입니다. 군 생활이 힘들잖아요. 부대 깃발에 입을 맞추고 하나가 되는 거예요. 거기서 전우애가 싹이 트는 거예요.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마다 체력단련을 합니다. 이 때 다른 부대하고 섞여서 해요. 체력 단련 중에 우리 부대원과 다른 부대원이 시비가 붙었습니다. 체력단련 중에 다툼이 생긴 거예요. 저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병사 하나가 가서 우리 부대원의 편을 들어주는 거예요. 부대원이 1400명입니다. 한 달에 백 여 명이 나가고 들어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몰라요. 그런데 함께 싸워주는 거예요. 편을 들어주는 거예요. 한 부대원이라는 동질의식이 있는 거예요.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자고 같은 훈련을 하는 동질의식이 있는 거예요. 저는 그때 그 모습을 보며 이게 동지의식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이 싸워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는 동일시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은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자리에 함께 서셨습니다. 때로는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때로는 왕따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때로는 병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마셨습니다. 함께 주무셨습니다.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예수님의 세례 정신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당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나도 너희들과 같이 고난당하는 너희의 형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갖는 하나됨의 의식입니다. 오늘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이 세례로 우리 모두가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겉으로만 세례 받으면 안됩니다. 우리 마음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하는 한 형자 자매입니다. 우리 이웃의 고통 슬픔 아픔을 함께 참여하는 세례의 정신을 가집시다.

 

4.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은 네 번째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은 쉽게 말해서 성경입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감동이라는 말이 생기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기로 된 책입니다. 성경은 생기의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새 생명을 얻습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살리는 책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생기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가르치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동안 가르침은 모두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몫은 제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의 몫은 우리에게 왔습니다. 가르침의 바통이 터치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음은 끝이 날 것입니다.

 

<직지심체요절>(1234년에 간행됨)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입니다. 금속 활자본인 독일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인쇄되었습니다. 1887년 서울에서 근무하던 프랑스 외교관이 프랑스로 가져갔습니다.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독일은 구텐베르크의 금속의 활자로 성경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금속활자로 소수의 책만을 찍어 관리들에게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금속활자를 철저하게 나라에서 관리했습니다. 구한말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몰랐습니다. 이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금속활자로 성경을 찍어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 내에 좋은 품질의 인쇄물을 많이 찍어낼까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은 오늘날 세계 출판 인쇄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유럽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 있습니다.

 

1999년이 지나고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에 세계 유수의 언론 매체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발명품을 뽑았습니다. 그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뽑혔습니다. 독일은 금속활자로 성경을 찍었습니다. 금속활자로 정보를 찍었습니다. 그래서 학자가 나왔습니다. 철학가가 나왔습니다. 사상가가 나왔습니다. 세계를 이끄는 리더들이 나왔습니다. 금속활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들었습니다. 그 금속활자를 우리나라는 나라 창고에 꼭꼭 감추어 두었습니다. 몇 사람에게만 공개되었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최초의 금속활자본도 지키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가치가 최고이면 무엇 합니까?

 

우리가 가진 복음, 이것은 이 땅에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생기의 책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것을 사용합시다. 꼭꼭 숨겨두지 맙시다. 전해야 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주님의 사명이 제자들에게 제자들의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이어져야 합니다. 이 사명 감당합시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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