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세례로 하늘을 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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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3:13~17
주일오전예배 | 2017-04-0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새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화가 납니다. 주인공이 악당에게 쫓기면 내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반대로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면 내 가슴이 시원합니다. 마음이 막 흥분이 됩니다.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성룡, 실버스타 스탤론, 아놀드 스월츠네거 같은 배우들의 쿵푸 액션 전쟁 영화가 많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다보면 왠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요. 친구들과 어깨를 으쓱거리며 흥분해서 영화관을 나옵니다. 나도 성룡처럼 날아다닐 것 같아요. 친구들과 아 뵤하며 성룡의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마치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인 된 듯한 착각을 하는 거예요. 주인공인 것처럼 우쭐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정신분석학에서 동일시(同一視) 또는 내재화라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의 태도, 가치관, 행동 등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행동과 말투, 사고방식과 닮게 됩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닮고 싶잖아요. 따라서 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책상 앞에 롤 모델을 붙여놓잖아요. 하지만 엑스트라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나는 항상 영화 속의 주인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이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시므로 사역을 시작하셨을까요? 세례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식을 앞두고 예수님의 세례가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세례 당사자뿐만 아니라 함께 세례식을 참관하는 우리 모두가 기도로 세례를 준비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예수께서 세례로 자신과 자기 백성을 동일시 하시다

예수님의 수세는 예수님 자신과 자신의 백성에 대한 동일시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회개할 필요도 없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14절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여기서 말렸다는 말은 한두 번 말리다가 만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렸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계속해서 말렸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굳이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의 수세는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백성과 동일한 죄인에 자리에 서신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수세 사건을 이 때에’(13a)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때는 언제일까요?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나올 때입니다.

<마태복음3:5-6>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세례는 동일시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물 속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며 물 속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죽음과 새 생명을 죄인과 같이 되셔서 그대로 체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므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소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만 자신과 자신의 백성을 동일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도 하늘에서 이 땅에 있는 자신의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땅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아파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과 자기 백성을 동일시하신 것을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증언합니다.

<히브리서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형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형제 중에 한 사람처럼 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빌립보서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과 죄인인 우리를 동일시하십니다. 세례라는 것은 동일시입니다. 예수님은 받지 않아도 되는 세례를 굳이 받으시면서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세례는 동일시입니다.

우리는 서민 대통령을 원합니다. 서민 대통령을 바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높은 자리에 있지만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다른 세계에 사는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대통령을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은 우리 마음을 알아주시는 대통령이십니다. 우리 마음만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대통령이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예수님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는 나 자신이 어느새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이 내 안에 있어요. 주인공이 내재화되었어요.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미 내 안에 있어요. 그런데도 예수님과 나는 항상 따로따로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해 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가 예수님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을 동일시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받은 세례는 나 자신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해요. 다음 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 받으시는 분은 세례받는 순간 그리스도와 자신을 동일시하시기 바랍니다. 세례 받으신 분은 내가 이전에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는 동일시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로 하늘을 여시다

자신과 우리를 동일시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닫혀 있는 하늘 문을 여신 것입니다. 창세기 3: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다시는 에덴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천사들이 불 칼로 지켰습니다. 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완전히 막혔습니다.

<이사야59:1-2>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로 인류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막혔습니다. 여기서 인류의 저주와 슬픔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완전히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태복음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의 세례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소의 휘장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린 하늘이 다시 닫힌 것이 아닙니다. 그 열린 하늘은 여전히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세례는 하늘을 여는 예식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씻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순간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열린 하늘이 내 열린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아주 가볍게 여깁니다. 기독교인 되는 하나의 의식 정도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세례는 그 정도의 예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음을 세상 앞에 공포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로 하늘을 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세례는 우리에게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게 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남미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볼리비아는 주석 · · 구리 · 텅스텐 등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손꼽힙니다. 아주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볼리비아 사람들은 `금방석에 앉은 거지'라고 일컬어집니다.

볼리비아에 사역하고 계시는 김이삭 선교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볼리비아에서 이삭학교와 사마리아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이삭 선교사님은 `잘못된 복음'`교육의 부재'를 볼리비아 가난의 원인으로 꼽습니다.

금방석에 앉은 거지 나라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2011년 발표에 의하면 북한의 지하자원은 43천조로 추산합니다. 지하자원의 수준이 세계적이라고 합니다. 북한에 매장된 지하자원 중 10가지 정도는 세계적인 품질과 매장량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 가치는 약 7000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하자원이 대부분 중국으로 흘러갑니다. 북한 인구의 32%가 영양실조입니다. 영양부족은 80%라고 합니다. 6세 이하 어린이 40% 안팎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린이 25%가 빈혈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발밑에 풍부한 지하자원이 묻혀 있는데 굶주림에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금방석에 앉아서 거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종종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봅니다. 거지처럼 가난하게 사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입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고 살아요. 정말 가난해요.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자손들이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님 유품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장판 밑에 돈이 수 천 만원 있어요. 장롱 속에 2-3억이 있어요. 어떤 분은 통장에 20-30억의 돈이 있어요. 돈이 있는데 쓰지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저는 종종 이런 고민을 합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활짝 젖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풍부한 복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금방석에 앉아서 거지 생활을 하는 나라와 다를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례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허락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사시길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세례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3:22에는 비둘기 같은 형체라고 했습니다. 영은 형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눈에 보이도록 비둘기의 형체를 하고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사자, 호랑이, 독수리, , , 늑대, 전갈 등 동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동물 중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체를 하고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체를 하고 임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령님께서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내신 곳이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말은 자동차처럼 하나님의 영이 어디를 운행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미 새가 자기 새끼나 알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가슴으로 품고 날개짓을 하듯 성령께서 원시 지구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부드럽게 보살피고 보호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모는 아이를 임신을 하면 태중에 있는 아이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습니다. 배를 쓰다듬고 배에 말하고 배를 만지고 배를 보호합니다. 배를 보면서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알처럼 생긴 원시 지구를 하나님의 영이 가슴으로 품으셨습니다. 만지시고 쓰다듬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지구를 상상하셨습니다.

4세기 말에 제롬(Jerome)이라는 사람이 번역한 불게이트(Vulgate) 라틴어 성경이 있습니다. 제롬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을 incubatat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 단어 incubator(배양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큐베이터는 온도 · 습도 등 기타 다른 환경조건을 성장 · 부화 · 생식에 최적의 수준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격리된 공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와 아주 비슷한 환경입니다. 지구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깊은 애정과 사랑을 인간이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났습니다.

<창세기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떠나신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예수님 위에 임재하셨습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동일시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순간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임재하십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을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 같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원시 지구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셨던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의 세례로 다시 이 땅에 위에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품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애정과 위로와 사랑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8년도에 출간된 브루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존이라는 사람이 천국에 가서 경험한 짤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존을 안내하기 위해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은 베드로가 보여주는 황금길과 천사들의 노랫소리 그리고 커다란 창고도 보았습니다. 존은 베드로에게 그 창고 안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보여주기를 꺼려하면서 안보는 것이 나을 거라고 했습니다. 존은 천국에 무슨 비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저 안에 도대체 얼마나 놀라운 것이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행사가 끝난 후에 존은 베드로에게 창고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약해 졌습니다. 사도가 문을 열자 존은 빨리 들어가 건물 안에 가득 차 있는 상자들을 보았습니다. 그 상자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존은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상자도 발견했습니다. 존은 자기 상자가 보고 싶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머리를 흔들며 뒤따라갔으나 존은 어느새 자기 이름의 상자를 들어다 보았습니다. 존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존이 열어본 상자 안에는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 원하셨던 수많은 복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은 전혀 구하지 않았습니다. 구하지 안아서 받지도 못했습니다.

야고보서 4: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허락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깊은 애정을 가지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구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빵을 앞에 두고 배고파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구합시다.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 안에 있는 영적 풍요가 우리 것이 되게 합시다. 주님께서 하늘을 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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