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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죠지 허비트라는 사람은 ‘기도는 영혼의 피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피에 있습니다. 인체에서 피는 생명을 지탱해주는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물질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피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또는 <끈질긴 과부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 형태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해설이나 주제 없이 오직 비유만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의 비유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같은 경우입니다. 어떤 때는 비유를 하신 후에 해설을 하셨습니다. 씨 비유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주제, 비유, 해설을 순서대로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서론 본론 결론을 나누어서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얼마나 강조하고 계신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1절은 주제입니다. 동시에 비유의 서론입니다. 2-5절까지가 비유입니다. 본론입니다. 그리고 6-8절이 비유 해설입니다. 결론에 해당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으로 <항상 기도, 낙심 금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기도 서론(1절) : 항상 기도, 낙심 금지
서론에는 기도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항상 기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낙심금지’입니다.
<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항상 기도’가 가능할까요? 1년 365일 24시간 항상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밥도 먹어야 합니다. 일도 해야 합니다. 쉬기도 해야 합니다. 때로는 텔레비전도 보아야 하고 신문도 봐야 합니다. 또 친구도 만나야 하고 쇼핑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늘 기도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틀림없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항상 기도>의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기도’라는 단어는 ‘~ 향하여 원하다’(προσεύχομαι = προσ(향하여) + εύχομαι(원하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항상 기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항상 원함’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이 말씀으로 실습을 해봤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 생활 속에서도 항상 그 원함을 가져봤습니다. 그랬더니 생활 속에서도 기도가 되는 거예요. 일을 하면서 걸어가면서 계속 원함을 가졌어요. 그랬더니 계속 기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쉽지는 않아요. 자꾸 잊어버려요. 하지만 가능해요. 여러분! 우리 생활 중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원함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길을 가면서도 사람을 만나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항상 원하세요. 삶이 간절해집니다. 삶 속에서 기도가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기도하려고 애쓰니까 제 마음에 은혜가 넘쳐요. 기쁨이 넘쳐요.
제가 아시는 분이 직장을 다니다가 사업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 사업을 한번 크게 실패한 적이 있어요. 거의 길바닥에 나 앉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사업 아이템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자금도 어느 정도 확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실패하고 나니까 다시 사업하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그리고 신중한 거예요.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도 불안하니까 기도를 시작한 거예요. 이 분이 너무 간절하니까 하루 종일 기도가 되더래요.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하루 종일 기도가 되더래요.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갈 때도 계속 기도가 되더래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니까 기쁨이 샘솟더래요. 그러면서 저에게 자랑을 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주님과 교제하는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과 대화가 되더래요. 간절하면 항상 기도가 됩니다.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항상 기도’는 ‘항상 원함’입니다.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 목사님이 있습니다. 5,000명의 고아를 길렀습니다. 70세 때까지 5,000명을 공부시키고 전도하고 훌륭한 인물로 키웠습니다. 뮬러 목사님은 “나는 기도의 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걸을 때, 누울 때, 일어날 때, 언제나 나는 기도합니다. 그리고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언제나 내게 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위한 때와 장소는 따로 없습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응답하십니다. 물론 기도의 장소를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삶 속에서 항상 기도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피곤하시죠? 바쁜 일이 생각나시죠? 때로는 힘든 일도 생각나시죠? 그래서 고민이 되시죠? 여러분! 아침에 눈을 뜨시면 바쁜 일, 힘든 일에 대한 고민을 뒤로 하고 하나님 앞에 원함을 먼저 가져보세요. 그래서 아침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해보세요. 길을 가면서도 기도하고 밥을 하면서도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도 기도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언제든지 들어주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낙심하다’는 말이 성경 원전 헬라어(ἐκκακέω)는 ‘약하게 되다, 낙망하게 되다, 활기를 잃다, 그만 두다’ 등등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힘이 빠져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그만 둔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할 때 낙심한다는 말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약해져 나중에는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낙심하지 말라는 말은 약하게 되거나 활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 제목이 생기면 의욕적으로 기도합니다. 처음에 기도할 때는 가슴이 뜨겁습니다. 금방 응답이 될 거 같아요. 어떤 때는 하늘에서 불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요. 가슴이 아주 뜨거울 때가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도 응답이 없어요. 상황도 그대로예요. 기도를 그렇게 했는데도 상황이 바뀌지 않아요. 그러면 힘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뜨겁던 마음이 냉랭해집니다. 마음에 ‘이건 안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힘이 완전히 쭉 빠집니다. 결국 기도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언제 내가 그런 기도를 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주님은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활기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약해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응답이 지연될 때입니다. 이 때쯤에 하나님이 ‘짠’ 하고 응답하시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아요. 내가 생각한 때에 응답이 없어요. 그러면 낙심합니다. 둘째, 내 생각과 다른 응답이 있을 때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길 바랐는데 저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대한 것 보다 훨씬 잘 되면 괜찮습니다. 그때는 참 좋아요. 그런데 기대치에 못 미치면 낙심이 됩니다. 힘이 쭉 빠져요. 그래서 기도를 포기합니다.
3월 둘째주에 아이들 진급예배를 드렸습니다. 풍선을 불어서 강단에 붙였습니다. 그때 불었던 풍선 두 개가 바람이 빠져 쭈굴쭈굴한 상태로 사무실 바닥에 떨어져 있어요. ‘저 풍선이 기도 같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 불 때는 탱탱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이 빠져요. 그러다가 완전히 빠져 주저앉습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이 5명의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시작한지 1년 6개월 만에 첫 번째 친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5년이 지난 후, 두 번째 친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12년 만에 세 번째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친구를 위해 52년 동안이나 기도를 드렸지만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뮬러는 늙어서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웠음을 예감하고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뮬러의 설교를 들은 네 번째 친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뮬러는 나머지 한 명의 친구가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조지 뮬러가 “52년 동안 기도를 했지만 완전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뮬러의 장례식에 마지막 다섯 번째 친구가 찾아 왔다가 뮬러가 ‘자신을 위해 52년동안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 영국을 다니며 “뮬러의 기도는 모두 응답되었습니다. 제가 그 최후의 응답입니다.”고 고백했습니다.
2. 기도 본론(2-5절) : 기도로 마귀를 짓밟으라
기도의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본론은 2-5절까지입니다. 여기에 두 사람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재판관과 과부입니다. 재판관은 불의합니다. 과부는 원한이 맺혀 있습니다. 고대에 고아 과부 나그네는 약자이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자신의 힘으로 가슴에 응어리진 원한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재판장에게 와서 하소연했습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과부의 호소에 재판장은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풀어주고 싶어서 풀어준 것이 아닙니다. 하는 수 없어서 풀어줬습니다. 공의로운 재판관이라 풀어준 것이 아닙니다. 귀찮아서 풀어줬습니다. 이것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기도에서 아주 중요한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기도의 대상, 기도자의 상태 그리고 원수입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기도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기도의 대상입니다.
A. 머리의 『그리스도의 기도학교에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머리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여, 이 말 속에는 나를 돕기 위해 그의 모든 무한한 지혜와 인내와 사랑을 내게 쏟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한 지혜와 인내와 사랑>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인내와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한 지혜로 응답의 가장 좋은 때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응답의 타이밍을 인내로 기다리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털어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을 무엇이든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무한한 지혜와 인내와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가장 좋은 타이밍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것을 언제든지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명심합시다.
둘째, 기도할 때 나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자를 과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대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이었습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이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무능함을 알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직물공장에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실이 얽히면 무조건 공장장에게 보고하시오”
어느 날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여공이 작업을 하는 도중에 실이 얽혀버렸습니다.
그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풀려고 하면 할수록 실은 더 얽혀버렸습니다.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여공은 그제야 공장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공장장은 여공에게 왜 즉시로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합니다. 공장장의 질책에 여공은 겁을 먹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공장장님, 저는 최선을 다해서 얽힌 실을 풀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장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공장장인 나에게 보고하는 일이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그런데 여공처럼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내가 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쉬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라도 먼저 기도해봅시다. 그래서 일이 더 복잡해지지 않도록 합시다.
시편 37:5에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5:22에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16:3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깁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셋째, 원수를 알아야 합니다.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원수 때문에 생긴 원합니다. 그러면 원수가 누구입니까? 원수는 마귀/사탄입니다. 모든 인류의 원수는 마귀입니다. 교회의 원수는 마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원수는 마귀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교회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이 있습니다. 해를 옷 입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발아래에는 달이 있습니다. 머리에는 12별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여자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일이죠? 그런데 용이 해산하려는 여인 앞에 있습니다. 용은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세요. 마귀는 교회를 공격해 왔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해왔습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 후에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바벨론이 망하자 메대 파사가 괴롭혔습니다. 메대 파사 후에는 헬라가 괴롭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가 교회를 짓밟았습니다. 그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원수의 공격은 계속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증하고 영악스러운 존재는 사탄입니다. 이 엠 바운즈의 『기도로 마귀를 짓밟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바운즈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귀는 이 땅에서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세상의 임금이요, 지도자이다. …마귀는 악한 짓을 행하라고 인간들을 유혹하느라 바쁘다. 마귀는 이 분야에 숱한 경험이 있고 한 마디로, 이 분야의 달인이다.”
“원수는 당신을 노리고 있다! 지금 원수의 공격에 대비하라! 원수 마귀는 당신을 낚아챌 기회만 엿보고 있다.”
“사탄의 가장 손쉬운 과녁은 잠자는 그리스도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영혼을 잃는 까닭은 원수의 공격에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수 마귀와의 격렬한 싸움은 잠들지 않는 철저한 경계와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을 요구한다.”
사무엘 차드윜은 “악마의 한 가지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악마는 기도 없는 성경공부, 기도 없는 봉사, 기도 없는 종교의식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마는 우리의 수고를 비웃고, 우리의 지혜를 조소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는 떤다.”라고 했습니다.
바운즈는 마귀를 짓밟는 방법은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마귀를 물리치는 일입니다. 기도는 마귀에게 우리의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기도로 삶 속에서 맺힌 우리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버립시다.
3. 기도 결론(6-8절)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은 결론 부분에 두 종류의 질문으로 말씀을 마치십니다. 첫째는 기도 응답에 대한 질문입니다.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부르짖다’가 헬라어로 ‘보아오’입니다. 이 말이 쓰인 경우가 성경에 여러 군데 있습니다.
<누가복음18:38-39>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38절에 ‘외쳐’, 39절에 ‘크게 소리 질러’라는 말이 보아오입니다. 맹인이 어떻게 소리질렀을 것 같습니까? 간절하게 외쳤습니다. ‘나를 고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하는 심정으로 외쳤습니다.
<마가복음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크게 소리 지르시되’라는 말이 보아오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소리 지르셨을까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절규입니다. 기도는 맹인처럼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처럼 부르짖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청년을 데리고 강가로 갔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의 옷을 벗게 하고는 무턱대고 손을 끌고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이 “아니, 목사님! 저는 수영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닌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일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청년의 머리를 잡아 물속으로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물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때서야 그 목사님은 청년을 건져주었습니다. 겨우 살아난 청년이 숨을 몰아쉬고 씩씩거리며 “아니,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물속에서 죽여 달라고 했습니까?”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래, 물속에 있으니까 어떻던가? 숨을 쉬고 싶지? 살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 거야.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세. 기도는 바로 그렇게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네.”라고 일러 주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믿음에 관한 질문입니다.
<8절 하반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인자가 올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가리킵니다. 종말에는 세상에서 부르짖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부르짖으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져서 이 단순한 진리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기도응답을 위해 우리에게 오셨을 때 주님께서 보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지성이 발전되고 있습니다. 지성이라는 눈으로 볼 때 기도응답이 우스워 보이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지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 세상은 여전히 미스테리에 휩싸여 있습니다. 기도응답은 지성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다니엘 12:4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사람들이 빨리 왕래합니다. 정말 바빠요. 그래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또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지식이 모니터에 뜨는 시대입니다. 원하는 정보가 인터넷에 다 올라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원하면 컴퓨터에 앉아 두드리면 됩니다. 궁금한 것을 컴퓨터에 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합시다. 기도만이 가슴에 맺힌 우리의 원한을 풀 수 있습니다. 기도만이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기도만이 마귀의 일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사탄이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도합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기도로 마귀를 짓밟아버립시다. 기도로 마음의 맺힌 원한을 풀어 주님 안에서 승리의 삶 사시길 바랍니다.
'옷을 만드는 것은 재단사의 일이고 구두를 수선하는 것은 구두수선공의 일이고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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