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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정말 싫은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25살 때이었습니다. 군 제대 후 얼마 안됐을 때입니다. 어느 날 후배의 자취집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자취방이 지하이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데 꼭 어디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창이 땅 위로 20-30센티 나온 방입니다. 잠을 자는데 깊은 웅덩이에서 자는 느낌이에요. 불을 끄면 캄캄합니다. 자는 장소가 중요한 것 같아요. 거기서 자는데 꿈에서 군입대를 다시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나는 제대했는데 왜 내가 군입대를 다시 하지? 나는 제대를 했는데 ‧‧‧ ’이런 말을 계속 반복하며 어느 저수지 둑을 혼자서 막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잠에서 깼습니다. 얼마나 군대가 싫었는지 일어나 보니까 몸에 식은땀을 죽 흘렀어요.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었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 싫던 군대가 그리워지는 거예요. 된장국, 훈련받던 일, 내무반 생활, 체력단련 심지어 얼차려(기합) 받는 것까지 그리워지는 거예요. 이 모든 일들이 정말 끔찍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그리워지더라고요. 그리고 또 1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40대 중반이 되니까 그렇게 싫었던 군대가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 있죠. ‘한번 다시 가봤으면! 그 때가 좋았는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다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모든 것이 아름답게 포장되는 거예요. 정말 싫었는데 시간이 흐르니까 좋게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워지는 거예요.
이런 것을 므두셀라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지난 날의 일들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사람의 심리입니다. 기억을 왜곡시켜버리는 일종의 도피 심리입니다. 예를 들면 첫 사랑이 안 좋게 끝났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첫 사랑을 아름답게 미화시켜 간직하려고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유년시절, 학창시절, 첫사랑에 대한 회상 등에서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므두셀라는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회상할 때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았다는 거예요. 성경적으로는 근거가 없습니다. 이런 므두셀라의 모습에 빗대어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표현이 탄생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므두셀라 증후군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을 비극이 아니라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죄와 실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므두셀라 증후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사는 태도입니다. ‘지금은 이유를 모르지만 틀림없이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이런 마음입니다. 이 시간 <므두셀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므두셀라의 이름
먼저 므두셀라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므두셀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5번 나오는 이름입니다. 그것도 족보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베일에 가려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 : מְתוּשֶׁ֔לַח
므두셀라는 므트와 셀라의 합성어입니다. 므트는 ‘죽다’ 또는 ‘남자’라는 뜻입니다. 므트를 ‘죽다’는 의미로 볼 때 ‘그의 죽음’ 또는 ‘그가 죽을 때, 그가 죽으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므트를 ‘남자’라고 해석할 때는 ‘어떤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셀라는 동사로 쓰일 때는 ‘보내다, 던지다’는 뜻입니다. 명사로 쓰일 때는 ‘창, 무기’이라는 뜻입니다. 셀라는 무엇을 ‘던져서 상대를 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셀라의 기본적인 뜻은 ‘보내다, 던지다’입니다.
따라서 <므두셀라>라는 말을 해석하면 두 가지 뜻이 나옵니다. 하나는 ‘창던지는 사람’, ‘무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죽으면 (그것을) 보낼(던질)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뜻은 같습니다.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뉴우 베리(New Berrry)라는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뉴우 베리도 ‘므두셀라’라는 말의 뜻을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대에는 마을과 마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상대 마을을 정복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지키는 창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즉 므두셀라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뉴우 베리는 사람들은 ‘창을 던지는 저 사람만 없어지면 저 마을을 우리가 깨끗이 소탕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 죽이면 마을은 쉽게 정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마을을 지키는 창을 잘 던지는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뉴우 베리는 이런 의미에서 ‘므두셀라’라고 하는 이름은 그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던지는 사람이나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말이나 똑같은 의미입니다.
므두셀라가 죽은 연도와 노아의 홍수는 같은 해에 있었습니다.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의 나이가 369세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가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창7:6). 다시 말해서 므두셀라의 죽음과 노아홍수는 같은 해에 있었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우연히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어떤 암시가 있습니다.
에녹에게 아들 므두셀라는 ‘영적 창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보면서 근신했을 것입니다. 에녹은 이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유1:14-16. 에녹의 계시를 믿은 사람들은 므두셀라를 보면서 죄악에서 떠났을 것입니다. 따라서 므두셀라는 에녹과 에녹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창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므두셀라는 시대의 <영적 창지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창지기를 세우셨을까요?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에도 창지기가 필요합니다. 등대교회에 창지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에 창지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 창지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창지기가 되세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창지기가 되세요. 믿음의 사람들을 지키고 깨우는 영적 창지기가 되세요. 여러분! 우리 가정을 위해서 영적 창을 듭시다. 이 시대를 위해서 영적 창을 듭시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영적인 창을 듭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진정한 창지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연약합니다. 창을 들지만 우리가 온전히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교회를 지키기에는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잃어버리지 않는 사건이 있습니다. 2014년 10월 의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택을 나갔습니다. 제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10여M 앞에 가요. 그 때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지역이 높은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낮은 지역에 있었습니다. 제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영적으로 곤고했습니다. 그냥 마음이 힘들어요.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져요. 그 순간 제가 보는 눈 앞에서 고등학생 한 명이 사이클로 제 아이를 받았어요.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깔렸어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때 제 마음 상태와 상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마음이 풀어질 때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그때부터 제가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의 허리를 조이고 또 조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잘 안돼요. ‘나는 내 집을 지키는 사람이다. 나는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다. 나는 성도를 지키는 사람이다. 내가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파수꾼이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정말 잘 안돼요.
우리는 영적인 창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창지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우리의 <완전한 창지기>이십니다.
<시편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세요. 졸지 않으세요. 주무시지도 않으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한 창지기>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삶에 창지기로 의지해야 해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사야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엄마도 때로는 젖을 먹이는 자식을 잊어버립니다. 자식을 낳았지만 잘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이 시대 최고의 창지기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창지기가 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창지기로 삼읍시다.
2. 므두셀라의 나이
므두셀라의 나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므두셀라는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969세’ 므두셀라의 나이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왜 므두셀라의 나이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을까요?
인류의 시조 아담①은 930세를 살았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②은 912세를 살았습니다. 셋의 아들 게난③은 905세를 살았습니다. 게난의 아들 마할랄렐④ 895세를 살았습니다. ⑤야렛은 962세를 살았습니다. 라멕은 777세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⑧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모두 천년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므두셀라는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1,000년이 가까운 삶을 살았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은 ‘궁창 위에 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궁창 위에 그리고 궁창 아래에 물을 두셨습니다.
<창세기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처음 창조된 지구는 물 층이 지구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이 물 층이 우주에서 지구로 오는 방사능을 비롯한 인체에 유해한 광선을 모두 막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노화가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자력 발전소에서의 제 1차 냉각수는 원자로를 냉각시켜 줄뿐만 아니라 방사능을 막아주는 제 1차 방어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진으로 방사능에 심하게 노출된 사람들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방사능은 우리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궁창 위에 물이 땅에 쏟아져 내려 이 방어막이 없어졌기 때문에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의 수명이 점차 줄었다는 것입니다. 천년 가까운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상한 전설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므두셀라는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러면 므두셀라가 가장 오래 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에녹은 므두셀라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예언이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서 14-16>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세상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은 후에 하나님은 므두셀라를 주셨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죽는 해에 노아의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시고 적어도 969년을 참으셨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 연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라는 말을 시간의 연장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회개하도록 시간을 연장하시는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살아 있는 한 인류에게 시간은 계속 연장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원하시기에 므두셀라를 빨리 데려가실 수 없으셨습니다.
<베드로후서3:8-9>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969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셨습니다. 오래 참으셨습니다. 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므두셀라의 나이에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습니다. 므두셀라의 나이에는 인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잉거솔은 어느날 무신론강의를 하였습니다. 시계를 탁상에 꺼내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5분간 시간을 주겠습니다. 내가 5분 동안 하나님을 저주(욕)할 텐데 그동안에 나에게 벌을 주지 못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5분 동안 하나님을 욕하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잉거솔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신은 없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앙인 데오드르파거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5분간으로 단축한 잉거솔이 실패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까지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 같이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3. 므두셀라의 인생
마지막으로 므두셀라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업적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은 것입니다(26절). 이것 외에 성경에 기록된 므두셀라의 업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래는 살았지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저는 므두셀라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간 위대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성경 믿음의 계보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5번 나옵니다. 창세기 5장에 3번, 역대상 1장에 1번, 누가복음 3장 예수님의 족보에 1번입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족보입니다.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의 족보가 있습니다. 아담의 족보와 가인의 족보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가인의 족보에는 부인 이름, 직업, 한 일들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온 업적이 있습니다.
<창세기4:19-22>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가인의 후예들은 아내 이름이 있습니다. 직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업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세상 자랑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창세기 5장에 믿음의 후손들은 자식을 낳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있다면 하나님과 동행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계보를 이은 것입니다. 출산을 통해 믿음의 계보를 잇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의 유일한 업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 산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이룬 업적이 전혀 없을까요? 성경은 세상 업적이 없어서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있는데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있지만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있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최고의 업적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반기문>이라는 사람을 다음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검색해보세요. 메인 화면에 출생, 가족, 학력, 수상, 경력 등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학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정책대학원 석사 외 2건> 최고 학력만 나옵니다. 물론 외 2건이라는 말을 클릭하면 두 가지가 더 뜹니다. 하지만 메인 화면에는 최고학력만 나옵니다. 경력은 <2007 제8대 UN 사무총장 외 14건>이라고 뜹니다. 14건이 더 있지만 메인 화면에는 최고의 경력인 <2007 제8대 UN 사무총장> 하나만 뜹니다. 반기문의 최고 이력은 <UN 사무총장>입니다. 이 최고 이력 앞에 다른 것은 다 뒤로 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최고 이력은 세상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네덜란드의 철학자(1632~1677) 바룩 스피노자는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닙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한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을 대변한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열심히 사세요. 여러분의 일터에서 경력을 쌓으세요. 하지만 이것을 명심하세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돈도 집도 차도 심지어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신기루처럼 살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동행 이것 하나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경력은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열심히 사세요. 최선을 다해서 사세요. 하지만 너무 매이지 마세요. 연연하지 마세요. 목매지 마세요. 신기루예요.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 그리고 우리말 성경에는 ‘벅찬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되는 일을 하려고 너무 목매이지 마세요. 되는 일을 하세요.
저는 가끔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을 읽습니다. "주여,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온을,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구별 할 줄 아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창세기 5장을 읽어보세요. ‘낳고 살고 죽었다. 낳고 살고 죽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22절에 ‘동행’이라는 말을 어떤 성경학자는 ‘산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님과 손을 잡고 산택하며 인생을 삽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최고의 업적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흐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여러분의 삶이되길 바랍니다.
어떤 분이 에녹의 동행에 대해서 인터넷에 올린 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에녹을 찾아오셔서, “에녹아 나와 함께 산책을 나가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에녹은 자기의 계획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산책을 하였어요. 처음에는 자기의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과 산책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점차 하나님과 산책하는 것이 매우 큰 기쁨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산책을 하던 중, 어느 날에는 하나님과 오랜 시간을 산책하였습니다. 한참 산책을 하다가 보니까 집에서 너무 멀리 나왔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부터 너무 먼 거리를 온 것 같네요.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에녹아, 여기는 너희 집보다 나의 집이 더 가까운 곳이란다. 그러니 나의 집으로 가자.”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본향으로 갔습니다.
죄악의 시대에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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