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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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5:22-24
주일오전예배 | 2017-03-1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지나온 발자국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험난하고 힘들었던 여정이나 가파른 고개 길에는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지와 낮은 구릉의 편안한 길에는 마치 나란히 걷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돌아다보며 항의하듯 물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주님. 왜 낮은 구릉과 평지에서는 주님께서 저와 동행하여 주시고 거칠고 험난한 길에서는 저 혼자 걷게 버려두셨는지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편안한 길에서까지 진실로 나를 신뢰하고 필요로 했다면 아마 그 길의 발자국도 하나뿐이었을 것이야. 그러나 너는 힘들고 험난한 길에서만 나를 찾았고, 그 때마다 나는 너를 업어서 다녔단다. 그리고 험난한 길이 끝나면 너는 날 멀리했지. 그 때마다 나는 네 곁에서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란다.”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함께 하심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데 나는 주님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동행을 원하십니다. 동행은 예수님이 나를 따라다니는 신앙이 아니라 나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나와 동행을 원하십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1. 동행

 

에녹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가 <승천>일 것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최초의 성경 인물입니다. 그러면 에녹은 어떻게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본문 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2절에도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에녹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게 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맞았다는 뜻입니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아모스 선지자와 하나님은 뜻이 같았기 때문에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한 곳을 향해 함께 가는 것입니다. 동행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걷다는 뜻입니다. 동행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목적이 같아야 합니다. 뜻이 같아야 합니다.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함께 걸을 수 없습니다. 에녹과 하나님은 마음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한 곳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은 하나님을 하나님은 에녹을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다투는 사람들이 300년 동안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를 기뻐해야만 동행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아닙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조건입니다.

 

에녹과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과 하나님이 교제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300년 동안 계속되는 지속적인 교제입니다. 교제 없이 어떤 누구도 동행할 수 없습니다. 동행은 교제의 증거입니다. 히브리 단어로 동행이라는 말이 에트라는 전치사와 함께 쓰일 때는 부부관계에 사용됩니다. 삶의 방식을 따르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에 따라 부부가 한 몸을 이루듯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교제를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교제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출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스코틀랜드 노인이 아파서 누워 있었을 때, 목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아 마자 침대 반대편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의자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 의자는 또 다른 방문객이 다녀간 흔적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한 각도로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보니 제가 제일 먼저 다녀간 사람이 아니었군요."

 

이 말에 노인은 놀라 목사를 쳐다보니, 목사는 자기가 방금 본 그 의자를 가리켰습니다.

 

"! 그 의자 말이군요. 그 내력을 말씀드리지요. 몇 해 전에 저는 이제 기도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지요.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무릎을 꿇은 채로 잠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설사 깨어난다 하더라도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을 어떻게 조절할 수 없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무섭고 나머지 이 일에 대해 어느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무릎 꿇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분은 '그냥 앉아서 하세요. 당신 앞에 의자를 하나 놓아두세요. 그러고는 예수님께서 거기에 앉아 계시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그 분께 말씀하세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후 그 노인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저는 쭉 그렇게 해왔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의자의 내력이지요."

 

그런데 한 주일이 지난 후 그 노인의 딸이 목사를 찾아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녀의 서재 안으로 안내되었고, 목사가 서재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 그녀는 자신을 거의 자제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께서 지난밤에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는 한두 시간 정도 누워서 쉬려고 제 방으로 돌아왔거든요. 아버지께서는 아주 편하게 주무시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버지께서는 그만 돌아가신 거예요. 몇 시간 전에 뵈었을 때 이후로 전혀 움직이시지 않은 채로 말이에요. 단지 한 손을 침대 옆에 있는 빈 의자 위에 놓으시고는 말이죠!”

 

2. 동행 계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므두셀라의 출생입니다.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므두셀라의 출생이 에녹에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어떤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을 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을까요?

 

므두셀라는 창던지는 사람또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창던지는 사람이 마을을 지켰습니다. 마을을 지키는 창던지는 사람을 므두셀라라고 했습니다. 창던지는 사람이 죽으면 그 마을은 끝입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의 죽음은 세상의 종말을 말합니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노아 홍수는 아담이 창조된 후 1,656년에 있었습니다. 므두셀라는 687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969세를 살고 1656년 노아 홍수가 있던 해에 죽습니다.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의 나이가 369세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가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7:6). 다시 말해서 므두셀라의 죽음과 노아홍수는 같은 해에 있었습니다.

 

므두셀라의 죽음과 노아 홍수가 어쩌다가 우연히 일치했을까요? 에녹이 이름을 그냥 므두셀라라고 지었는데 노아 홍수와 그의 죽음이 우연히 일치했을까요? 아닙니다. 에녹에게 장차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유다서1:14-16>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므두셀라의 이름은 우연히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이 세상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암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받은 사람은 에녹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6:17)고 말합니다. 여기 흔적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스티그마입니다. 스티그마는 시뻘겋게 데워진 쇠로 만든 도장을 가축에 찍어 소유자를 표시하는 `낙인`입니다. 고대에 노예의 몸에 주인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이름>의 불도장을 찍혀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한 고난이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바울은 고난의 흔적을 예수님의 낙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고난의 흔적에 고난의 상처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의 몸에 고난이 넘친 것 같이 하나님의 위로도 넘쳤습니다. 바울의 삶에 아픔이 넘친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도 넘쳤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흔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바로 하나님의 암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므두셀라를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의 첫째가 주은입니다. 항상은 아니지만 이름을 부를 때 주의 은혜를 자주 생각합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서 어떤 때는 두려워요. 어떤 때는 주님께 감사해요. 어떤 때는 주님께 죄송해요. 어떤 때는 주님을 묵상하게 돼요. 어떤 때는 겸손해져요. 아이 이름 두 글자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거든요. 옥편을 찾았습니다. 성경을 찾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마땅한 이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고민을 했습니다. 이름 두 글자를 짓기 위해 11개월을 고민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지은 이름이 주은입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는 인간적인 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암시가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름이 므두셀라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죽으면 세상은 끝이다.’ 인간적인 고민으로 지은 이름도 부모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암시로 지은 이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가 죽으면 세상은 끝이다이 종말론적인 신앙이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었습니다. 두 달 남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낙심되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습니다. 남은 두 달을 어떻게 살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먼저 재산부터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지!”라고 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헌신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잘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처녀 때 은혜 받고 선교사가 된다고 했는데 결혼 후 바쁘게 살다가 그 다짐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후방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다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또 잘라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또한 매일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유서처럼 매일의 묵상을 썼고 미웠던 사람에 대한 미움을 털고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 화해했고 평소에 전도하고 싶었던 사람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2달이 지나면서 죽을 날이 가까이 되었는데 오히려 몸에 힘이 났습니다.

 

2달 후 어느 날, 검진 후 의사 선생님이 난처한 듯이 말했습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지난번의 간암 진단은 오진 같습니다. 암 덩어리가 안 보입니다.”

 

그때 세상이 달라 보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이에 병이 나았을 수도 있고 오진일 수도 있었지만 오진이라도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오진으로 돈을 많이 써서 억울하지 않나요?” 그분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는 지난 두 달처럼 보람 있고 행복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종말의식은 주님과 동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기쁘게 주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것은 신기루와 같이 없어질 것입니다. 슬픔도 고통도 아픔도 그리고 부귀영화도 신기루와 같이 없어질 것입니다. 종말의식을 갖고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3. 동행 환경

 

에녹은 어떤 환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을까요? 에녹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많지 않지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에녹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에녹의 업적이 거의 없습니다. 에녹의 업적이 없어서 기록을 안했는지 있지만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기록을 안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에녹이 300년 동안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은 결혼 후 몇 년만 자녀를 낳은 것이 아닙니다. 결혼 후 자녀 출산 계획을 세워놓고 4명 혹은 5명만 낳은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2030년만 자녀를 낳은 것이 아닙니다. 300년 동안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승천하는 그날까지 자녀를 낳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자녀를 낳았다면 몇 명을 낳았을까요? 3년에 한 명씩 낳았다면 100명입니다. 5년에 한 명씩 낳았다면 60명입니다. 10년에 한 명씩 낳았다면 30명입니다. 에녹은 자녀를 아주 많이 낳았습니다. 에녹은 자녀를 낳고 키우고 교육하며 살았습니다. 그것도 300년 동안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삶입니다. 50년 낳다가 중단한 것이 아닙니다. 300년 동안 계속 낳았습니다. 요즘은 자녀를 둘이나 셋 낳고 힘들어해요. 죄송합니다. 어떤 분은 막 지겨워해요. 그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요. 그런데 에녹은 30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지겨워하지 않았습니다. 싫증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주님을 기뻐했습니다. 주님과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작가들이 굉장히 놀랍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아주 평범한 일들을 주제로 글을 씁니다. 물론 특별한 소재를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 안에 담겨진 삶의 가치를 들어냅니다. 주제가 아주 평범한 것들입니다. 우리 일상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읽는 사람들이 공감해요. 감동해요. 심지어 눈물까지 흘려요. 이것이 작가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신앙인들이 바로 작가의 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들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감격하며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을 일상의 일들을 권태롭게 여깁니다. 싫증냅니다. 짜증냅니다. 한숨을 쉽니다. 그래서 뭔가 자극적이고 새로운 것들을 원합니다. 그래서 탈선합니다. 이제는 탈선이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죄 짓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를 아주 자극적인 것을 원합니다. 영화도 드라마도 놀이기구도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해요.

 

제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루에도 같은 기도를 두 세 번씩 하게 됩니다. 어느 날 기도하기 위해 강대상에 올라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또 기도!’ 제 입에서 한숨이 나오고 헉 소리가 나와요. ‘어휴, 또 이 기도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같이 같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같은 성경을 읽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같이 같은 찬송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같이 같은 교회를 가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같이 같은 집에 사는 거예요.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반찬을 먹고 사는 거예요. 여러분! 싫증내지 마세요. 권태롭게 생각하지 마세요. 탈선하지 마세요. 지금 가는 믿음의 길을 그냥 계속 가세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예요. 에녹은 300년 동안 이렇게 살았어요. 이런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했어요. 이런 삶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발견했어요. 여러분! 이 믿음의 길을 가세요.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세요. 삶 속에 감추어진 은혜를 발견하세요. 그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세요.

 

두 번째, 에녹은 아주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유다서1:14-16>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에녹이 사는 때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신 시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두운 죄악의 시대이었습니다. 에녹은 아주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에녹의 시대와 같습니다.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녹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에녹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환경에서 주님과 날마다 동행했습니다. 매일 같은 일들이 반복됐습니다. 그것도 300동안이나. 에녹은 반복되는 지루한 삶을 싫증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 마음의 자신의 마음을 맞추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자신의 계획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비록 심판이 작정된 어두운 세상이지만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은 이런 에녹을 조롱했습니다. 그래도 에녹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다가 그대도 천국까지 올라갔습니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이 받아들이다, 이끌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에녹을 취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으로 바로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없었습니다. 에녹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동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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