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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제가 입춘이었습니다. 24절기 중에 첫 번째 절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입춘이 되면 <입춘대길 건양다건>이라는 입춘첩을 대문에 붙이는 전통이 있습니다. 새봄이 되니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정국이 어수선합니다. 하지만 봄은 왔습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봄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부활을 이기는 죽음은 없습니다. 부활을 이기는 고통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어수선한 세상을 부활 신앙으로 이기시길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불과 한 달 정도 남겨놓았을 때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20km 떨어진 곳입니다. 갈릴리 바다 북쪽으로 약35km(~4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팔레스타인 최북단에 있는 도시입니다. 근처에는 요단강의 발원지가 있습니다. 헬몬산 기슭으로 아름다운 전원도시입니다. 땅이 비옥해서 소들이 살찌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바산(Bashan)이라고 불렸습니다.
'가이사랴'란 말은 '황제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빌립은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도시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지었습니다.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지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규모가 있는 도시여야 했습니다. 조그만 도시는 안됩니다. 둘째, 황제를 섬기는 신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헤롯 빌립은 거대한 황제 숭배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우상의 도시이었습니다. 각양각색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원래 이름은 파네아스(Paneas, 또는 파메아스Pameas, 아랍어로는 바니아스)였다. 헬라의 신 “판”(Pan)에게 바쳐진 동네라는 뜻입니다. “판”은 목동과 가축의 신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목양의 신을 상징하는 우상들이 많았습니다. 구약시대 바알 숭배의 중심지이었습니다(구약 바알갓-행운의 바알). 또 헬라의 신당들도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빌립보 가이사랴는 온갖 우상 숭배와 잡신 숭배의 중심지이었습니다.
잘 사는 도시입니다.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우상의 도시입니다. 길거리에 우상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세상 왕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도시입니다. 로마 황제 숭배 신전이 있습니다. 세상의 한 가운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애매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고백해야 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정곡을 찌르는 대답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인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교회 창립입니다. 이 시간 ‘내가 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리라’이라는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
18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교회 설립을 처음 공포하시는 순간입니다. 이전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역사적으로 교회라는 말을 제자들 앞에서 처음 사용하고 계십니다. 제자들 또한 교회라는 말을 처음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교회가 무엇일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일까요?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좀 하신 분들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에크’라는 말과 ‘칼레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에크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칼레오는 <내가 부르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에클레시아’란 말을 글자 그대도 하면 <내가 ~로부터 부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에클레시아는 명사형이니 <내가 ~부터 부른 사람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어디로부터 부르셨는가? 세상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나온 사람들의 모임,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사람을 세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불렀을까요? 이것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적어도 두 번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한번은 전도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 누군가가 나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에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초청이 있어도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이 초청에 응답하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 부르심입니다. 전도를 통해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말씀이 선포됩니다.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은 회심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돌아갑니다. 이때 회심을 하게 된 사람들은 신자가 됩니다. 내적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누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냈을까요? 전도자일까요? 목사일까요? 부모님일까요? 친구일까요? 모두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내 교회>라고 하시며 교회를 세우시는 주체가 예수님 자신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장로도 아닙니다. 권사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여러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전도자가 여러분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주의 교회를 세우시려고 주께서 여러분을 세상으로부터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주인이 사람인 교회를 봅니다. 또 교회의 주인을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분당에 가면 지구촌교회가 있습니다. 1994년 1월에 이동원 목사님이 개척을 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10년이 되었을 때 축제를 열었습니다. 축제 중에 한 집사님이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드디어 목사님이 마음껏 목회할 수 있는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교회의 주인이 내가 되어 가고 있구나!”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은 축제가 끝나면서 65세에 은퇴할 것을 공포하셨다고 합니다.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목사님은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 예배실을 꾸밀 때이었습니다. 과정에서 어떤 분에게 무엇을 부탁했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여기를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 말을 하셨습니다. 대화 중에 그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세운 교회니까 목사님 교회죠?” 깜짝 놀라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이 집사님! 이 교회가 왜 제 것이에요. 이것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그 말이 가슴에 딱 걸려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은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입니다.
2. 반석 위에 세우진 교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반석이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반석이 베드로라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해석입니다. 천주교는 ‘반석’을 ‘베드로의 인격’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 이런 해석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베드로를 제자 삼으실 때에 ‘게바’라는 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람어로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라는 말도 <돌, 반석에서 떨어져 나온 돌멩이 혹은 돌덩이>라는 뜻입니다.
또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천국의 열쇠’는 교회의 통치운영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은 이 반석이 베드로이고 교회는 바로 이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1대 교황이라고 합니다.
둘째, 이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16절)
베드로는 지금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세 종류입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이들은 그 자리에 취임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유형의 지도자입니다. 왕은 다스리는 자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는 왕들 때문에 아픔을 당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왕을 기다렸다.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 우리를 공의로 통치할 진정한 왕을 기다렸다. 유대인들은 조상 때부터 가짜 선지자를 경험했습니다. 그 가르침으로 어둠 속을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 우리를 진리로 가르쳐줄 선지자를 기다렸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의 죄를 먼저 씻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사장을 기다려왔습니다.
이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사명을 한 번에 완성할 수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조상들이 기다려왔고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당신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왕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당신이 나를 통치할 왕, 당신이 나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분, 당신이야 말로 나의 죄의 문제를 포함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사장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구주,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고백의 핵심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가 어디입니까? 각종 우상들이 이곳저곳에 즐비하게 서 있는 땅입니다. 각종 잡신들이 있는 곳입니다. 황제 숭배의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상 황제의 도시에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 우상의 땅에서, 세상의 왕을 숭배하는 곳에서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왕이라고 나의 길이라고 나의 삶의 문제의 해결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우상의 땅이 아닙니까? 천안, 쌍용동, 불당동, 오룡동, 구룡동 그것도 모자라서 용곡동입니다. 이 우상의 도시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대답할 수 있을까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믿지 않는 친구가 주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시선 불편한 앞에서 당신은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의 철학가는 1960년대 해체주의라는 새로운 철학 사조를 전개했습니다. 해체주의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전체성을 부인합니다. 신(神)이나 이성 등 질서의 기초에 있는 것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다원론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①상대적입니다. 절대적인 가치는 없습니다. ②불확실합니다. 모든 것이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뚜렷한 가치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인지 엘리야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윤리 선생이 되고 세계 4대 성인이 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고백은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호의적인 고백이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애매한 대답이 기독교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직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반석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 기독인의 이 분명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시 한번 유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서 <너는 베드로라>는 말은 문맥상 필요 없는 말입니다. 안해도 되는 말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만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라는 말 앞에 너는 베드로라는 말을 굳이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은 신앙고백을 하는 그 사람의 인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주교의 해석을 유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틀림없이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저와 여러분, 여기에 모인 우리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예배를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교회는 없어지는 것인가? 성도님들이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남편이 예수 믿습니다. 아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자녀가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면 그 가정은 지금 교회가 아닐까요? 그 가정은 반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제도적인 교회를 부인하는 것 아닙니다. 제도적인 교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제도적인 교회가 없어지면 교회는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우리 교회는 이 예배실 울타리를 넘어가야 합니다. 교회는 여기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실이라는 울타리를 넘어가야 합니다. 저기 창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거주하는 그곳에 작은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담장을 넘어갈 때 우리는 세상의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담장을 넘어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왜 예수님은 교회 설립을 말씀하시는데 예루살렘에서 하지 않으셨을까요? 예루살렘에서 머물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넘어 이방 세계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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