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부르심에 함당하게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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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4:1~3
주일오전예배 | 2017-01-1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김병규 씨의 고장이라는 창작동화집이 있습니다. 이 책에 <잘 난 사람이 가는 감옥>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어학자들이 감옥이라는 뜻을 어떻게 정의할지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현재처럼 잘 난 사람이 가는 집으로만 풀이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옛날처럼 죄 지은 사람을 가두는 집이라는 풀이도 덧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어학자들은 둘로 나누어져 옥신각신 싸웠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자 나라에서 감옥을 연구하는 특별반을 짰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감옥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어귀 널찍한 터에 추장이 그려놓은 동그라미가 바로 감옥이었습니다. 꺾쇠가 추장 앞에 불려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네 죄를 알렸다!”

추장의 추궁은 서릿발 같았습니다.

네 어제 사냥터에서 꿩 한 마리를 몰래 품속에 숨기고 갔습니다.”

사냥은 함께 하고, 잡은 짐승은 똑같이 나누는 원칙을 모르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분별없이......?”

저에게는 자식 일곱이 올망졸망 딸려 있습니다. 거기에다 부모님이 계시고 동생이 다섯이나 됩니다. 아내까지 해서 식구가 모두 열여섯 명이나 됩니다.”

저런! 대단하군.”

그런데 사냥한 짐승을 집집마다 똑같이 나누니 우리 식구에게는 먹을 게 늘 모자랐습니다.”

사정은 딱하다만, 법은 법이니라.”

저 동그라미 속에 해 뜨기 전에 들어가 해 질 때까지 나오지 마라.”

그런데 감옥이 생긴 이후로 마을에 동그라미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땅바닥에 추장이 그려 놓은 동그라미를 넘을 생각은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달봉이 총각과 추장의 딸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죄는 두 사람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달봉이가 추장의 딸에게 말합니다.

우리 도망칩시다.”

어디로요?”

산 넘고 강 건너서 딴 나라에 가서 삽시다.”

하지만 무슨 재주로 이 동그라미를 벗어나요?”

이까짓 감옥, 나는 넘을 수 있소.”

달봉이는 동그라미를 발바닥으로 지워버렸습니다. 추장의 딸은 벌벌 떨었습니다. 달봉이는 추장의 딸의 손을 잡고 먼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이 최초의 탈옥 사건으로 온 고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튼튼한 감옥을 새로 지어라.”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집 모양의 감옥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감옥에 가는 사람은 더 늘어났고 감옥도 더 늘어났습니다.

 

여러분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거기에 갇혀 살지는 않으십니까? 심리학자 케이치프 노이드는 사람은 여섯 개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노이드는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을 때 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1.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이 시간 저는 여러분에게 사람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갇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13권의 신약 성경에 주 안이라는 말을 45번 씁니다. ‘예수 안이라는 말을 53번 씁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44번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안이라는 말을 18번 사용합니다. 160번입니다. 바울은 주 안이라는 수식어를 빼고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주 안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의 삶과 사역이 모두 철저하게 주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에서 바울은 주 안에 갇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죄인들은 진짜 감옥에 갇힙니다. 잘난 사람은 마음에 있는 감옥에 갇혀 삽니다. 그래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라는 감옥’, ‘주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기 갇히다는 말이 쇠사슬로 완전히 묶여 지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용변을 보러 다닐 자유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갇힌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라는 감옥에 완전히 갇혔습니다. ‘주라는 감옥에 갇히면 이 세상에 대해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감옥 안에서도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수님 이후 2000년 동안 인류 역사에 바울처럼 자유했던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 자유라는 말이 36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25번 사용합니다. 한 번이 바울과 관계가 있습니다. 나머지 열 번이 복음서와 공동서신에 나옵니다. 바울은 주 안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자유했습니다. 여러분 주 안에 갇히세요. 이것이 세상에서 자유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투옥 : 161~63, 266~68).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수감 중인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자유인입니다. 권면을 한다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거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암으로 서울 어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3년 전에 암 수술을 했습니다. 그 동안 암세포가 뇌와 시신경으로 전이가 됐습니다. 암세포가 시신경을 눌러 한쪽 눈을 뜨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방사선 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10번 중에 8번 방사선 치료를 받았을 때 제가 갔습니다. 방사선 치료가 얼마나 힘들어요. 너무 힘이 들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머리카락은 이미 다 빠졌습니다. 8번을 받았으니까 마지막 고비예요. 몸도 마음도 정말 힘든 때입니다. 3년을 치료받았지만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됐습니다. 이 정도면 소망이 없는 상황입니다. 50대 중반입니다. 아들딸이 이제 20대 초반 중반입니다. 아직 젊습니다. 얼마나 측은해요. 그런데 제가 가서 보니까 전혀 측은한 상황이 아니에요. 음식을 잘 드시고 있어요. 말과 행동이 암에 걸린 사람 같지 않아요. 그분이 저에게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해요. 제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입장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권면할 사람은 저인데 오히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분이 저를 격려하는 거예요.

 

문병을 갔다 왔는데 두고두고 그 권사님의 말과 태도가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잖아요. 저도 이런 분 저런 분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그 분의 말과 태도가 제 마음에 두고두고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권면을 한 사람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격려를 한 사람이 심한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절망 중에서 진리를 발견합니다. 인생의 풍랑 속에서 길을 발견합니다. 고통 속에서 생명을 발견합니다. 거기서 발견한 진리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 됩니다. 바울은 옥게 갇혔습니다. 거기서 조용히 앉아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교리가 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완성이 되어갔습니다. 그 성경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어떤 신학자는 에베소서를 가장 아름다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에베소서는 신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를 능가할 편지가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에베소서가 정말 세련되고 정돈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풍랑 속에 있으십니까? 고독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십니까? 마음이 답답하십니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와 진리를 발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은 어떤 하나님의 보배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로마까지 후송되는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앞길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삽시다. 부르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곁으로 부른다, 함께 있도록 부른다는 뜻입니다(παρά(곁에, 가까이, 함께) + καλέω(부르다, 초청하다) = παρακαλέω).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주님 가까이로 부르셨습니다. ‘합당하게라는 말이 헬라어로 악시오스(ἀξίως)입니다. 악시오스는 훌륭하게 어울리게 정당하게 적당하게 상당하게 알맞게 어울리는 태도로등등의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답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핸드릭슨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은 너 자신이 무엇인가 알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에 3금 제도가 있습니다. 금주 금연 금혼입니다. 1952년에 생긴 법입니다. 지금은 완화가 됐지만 반세기 동안 지켜져 왔습니다. 육사 생도는 제복을 입은 상태에서 자전거를 타지 않습니다. 지하에 있는 다방에 가지 않습니다. 아직 장교가 아닙니다. 장교가 되려면 아직 관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품위가 손상된다는 것입니다. 육사생도의 자부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습니까? 자부심을 가지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가까이에 있기 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제 그 부르신 그 부름에 어울리는 삶을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2. 합당한 삶의 덕 5 가지

 

그러면 그 부름에 합당한 삶은 어떤 것일까요? 그 부름에 합당한 삶이 2-3절에 있습니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에 부름받은 사람들의 합당한 삶의 덕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겸손입니다. 겸손은 헬라어로 타페이노프로수네입니다. 타페이노프로수네는 땅바닥 위로 올라가지 않는, 땅바닥에 엎드린라는 뜻을 가진 타페이노(ταπεινος)와 횡격막이라는 뜻의 프렌(φρην)이 합성된 여성 명사입니다. 프렌은 생각이라는 뜻을 가진 프로네마(φρονημα)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고대 시대에 횡격막은 사람의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생각했습니다. 겸손은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리어 머리를 땅 위로 내밀지 않을 정도로 낮아진 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거예요. 또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는 거예요. 교회 안에 자신보다 더 낮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겸손의 반대가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그런데 겸손이라는 것이 참 어렸습니다. 교만이 나도 모르게 마음이라는 땅 위로 두더지 같이 솟아 올라와 고개를 듭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밭에 간 적이 있어요. 밭에 가면 두더지가 굴을 파 놨어요. 두더지가 정말 많았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두더지가 땅 위로 올라와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려요. 저는 잡으려고 쫓아가면 쏙 들어가요. 두더지는 자기가 파놓은 땅굴로 지나갑니다. 그러면 그 움직임이 보입니다. 제가 나뭇가지로 굴을 때리기도 하고 막 쑤십니다. 두더지가 혼이 나죠. 한동안 잠잠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올라와요. 혼이 나도 자꾸 올라옵니다. 땅 속의 두더지처럼 잘난 체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속에서 자꾸 올라옵니다. 그때마다 두더지 잡듯이 교만을 잡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이 제일 먼저 기르치는 최고의 덕이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은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도덕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겸손합시다. 교만이 두더지처럼 우리 횡격막을 뚫고 마음으로 올라오면 두더지 잡듯 교만을 잡읍시다. 겸손이 주님의 부름에 합당한 삶입니다.

 

두 번째가 온유입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오테스(πρότης πραότης, 온순함 삼감 참음 관용 온순 친절 상냥함)입니다. 이 단어는 부드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프라우스에서 온 단어입니다. 헬라어 어원에서 본 온유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다른 이들을 먼저 돌보는 이타적인 기질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온유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성경에서 모세는 온유한 사람의 표상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죽은 것 같습니다. 모세는 재혼을 합니다. 그 재혼의 대상이 아프리카 구스 여인이었습니다. 구스인은 흑인입니다. 이것을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인 아론이 비방을 합니다. 비방한 이유를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하지만 그 속마음은 모세의 탁월한 지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민수기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너만 잘 났니? 나도 잘 났다.’ 미리암이 이렇게 모세를 비방했어요. 그런데 모세는 일체 말이 없습니다. 미리암 아론 그리고 모세 세 사람은 남매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만약 여기서 미리암의 비방에 대해 모세가 어떤 말을 한 마디라도 했다면 백성들은 형제들끼리 싸운다고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덕스럽지 않습니까? 모세는 , 그게 아냐?” “누나, 그게 아냐?”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형제들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때 모세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수기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 보다 더 온유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여기에 온유라는 말이 갑자기 나왔을까요? 사람들은 자기 얼굴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할 말 안하고 참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으로 삼킵니다. 점잖은 척, 인내심이 많은 척, 온유한 척, 착한 척, 신사 같은 척, 숙녀 같은 척하며 좀 기분이 나빠도 참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참지 않습니다. 자기 동생이나 언니나 형에게는 막말을 합니다. 그냥 막 대하는 거예요. 참지 않습니다. 밖에 나가서 웃어른에게는 공손합니다. 예절바르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집에만 가면 부모님을 막대합니다. 밖에서는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 그런데 집에만 가면 막무가내예요. 밖에서 온유한 사람이 집에서는 온유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왜 그럴까요? 집에서는 사람이 풀어질 때가 많아요. 그래서 화를 잘 냅니다. 그런데 온유라는 것은 화를 낼 수 있는데도 내지 않고 끝까지 자기를 제어하는 부드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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