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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느 군부대에서 소대장이 신병에게 국기 게양대의 높이를 재오라고 했습니다. 신병이 줄자를 가지고 국기 게양대 위로 올라가려고 끙끙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병장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야! 위험하게 거기는 왜 올라가?” 이등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예. 소대장님이 게양대 높이를 재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병장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야! 힘들게 왜 올라가! 게양대 봉을 빼서 바닥에 눕혀놓고 길이를 재면 되잖아?” 그러자 이등병은 인상 쓰면서 대답했습니다. “소대장님이 원하는 건 높이지 길이가 아니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이것을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인지적 오류를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답은 이미 정해놨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있은데 자기가 정해놓은 답에 맞는 것만 골라서 듣고 자기의 생각이 맞는다고 말합니다. 답을 정해놓고 답과 다른 정보들은 듣지 않습니다. 확증편향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답정너입니다. 확증편향이 영어로 Confirmation Bias인데 우리말로 옮기면 ‘선입견 확인’, ‘편견 확립’ 정도일 것입니다. 진실이 아니라 선입견을 맞는다고 계속 세워하는 것입니다. 편견을 진실로 확립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답정너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되면 빨간 펜으로 밑줄을 칩니다. 나중에 그 부분만 기억하면 성경을 답정너로 만드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는 예수님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그런데 11절과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1절과 12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내가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야망이나 소원을 이루는 주문이 아니라,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견뎌내고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공과 자기 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한 부분만 읽으면 성경을 답정너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기도하고, 내 경험을 내려놓고 예배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자아를 깨뜨리십시오. 답정너라는 우상을 깨뜨리고 말씀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BC 588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시드기야 왕과 유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낙심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우리가 바벨론 군대를 무찌를 수 있다. 용기를 내서 싸우자” 이런 말이 아닐까요? 시드기야 왕은 선지자에게 이런 말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정 반대의 예언을 합니다. “우리는 바벨론 군대에 패하게 될 것이고, 왕은 포로가 돼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 바벨론에게 항복해라. 그래야 살 수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군대는 사기가 저하되고, 백성들은 불안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국론이 분열됐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완전히 매국노적인 발언입니다. 이적행위입니다. 시드기야 왕과 대신들이 화가 나서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5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듣기 싫은 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을 막는 행위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사방이 막혀있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외부의 보급과 교류를 완전히 차단해 성 내부 – 사람, 가축 - 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 10년이라고 했습니다. BC 587년입니다. 588년에 포위됐습니다. 예루살렘이 외부와 차단이 된지 1년입니다. 아무도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아무도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성 안은 식량 부족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풀과 나무껍질을 먹고, 심지어 아이를 잡아먹는 처참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벽 안의 우물과 저장된 물이 고갈되어 목말라 죽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게다가 전염병까지 돌아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 되었습니다. 사면초가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바벨론에 항복하면 모두가 삽니다.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말씀을 막아버렸습니다. 사방이 막혔습니다. 그래도 하늘은 열려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 선포됐습니다. 살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하늘까지 막아버렸습니다. 말씀을 막는 일은 하늘을 막는 것입니다.
586년 4월 9일 밤 시드기야 왕과 군사들은 왕의 동산 문 길을 통해 성을 빠져나와 아라바 길로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군대에게 여리고 평원에서 붙잡힙니다. 시드기야는 하맛 땅 립나의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고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레미야 예언대로 됐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자기뿐 아니라 자식들, 백성들이 다 살았습니다. 왕이 백성들을 죽인 것입니다.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을까요?
우리가 사면초가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말씀을 들으면 삽니다. 하늘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드기야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을 막아버립니다. 살다보면 질병, 물질, 자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생깁니다. 이럴 때 시드기야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고난이 오면 예배도 안 드리고,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도하고 말씀 들으면 삽니다. 믿으십니까? 어떤 순간에서도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예배하십시오. 그러면 삽니다. 우리는 시드기야와 같은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일은 하늘을 막는 것입니다. 예배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듣고 예배하십시오. 말씀이 길입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하나님은 사면초가 상황에서 예레미야에게 아주 터무니없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아나돗에 있는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입니다. 당시는 씨족사회입니다. 만약 씨족 중에 한 사람이 땅을 팔게 되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사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가까운 친족을 기업 무를 자라고 합니다. 땅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는 기업이었습니다. 이것을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아나돗에 예레미야의 사촌인 하나멜이 빚을 졌는지 땅을 팔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예레미야에게 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7절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말도 안 되는 명령입니다. 지금 유다는 전쟁 중입니다. 이길 확률은 없습니다. 바벨론이 유대 땅을 다 정복했고, 예루살렘 성만 남았습니다. 포위된 지 1년입니다. 성 안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나라가 거의 망했습니다. 빼앗긴 땅을 사서 뭐하겠습니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 코림 반도에 땅 만평 있는데 1/1000 가격으로 줄 테니 사라고 한다면 사시겠습니까? 이런 일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파는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고 사는 사람도 이상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런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시에서 어느 지역을 개발했습니다. 시장 주변 사람들이 그 지역의 땅을 사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시장이 지인들에게 정보를 미리 줘서 땅을 사게 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땅 투기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결혼을 안 했습니다. 물려줄 부인도 자식도 없습니다. 이럴 때 땅을 사는 것은 그냥 그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명령입니다. 너무 이상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땅을 삽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납득이 안 되지만 순종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순종은 이해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믿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도 믿음으로 하는 게 순종입니다. 사람들은 납득이 되면 하겠다고 합니다. 납득시키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겠다고 합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순종은 납득이 안 되도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해는 안 됐지만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예레미야는 100퍼센트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8-9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샀습니다.
크리스천의 능력이 점점 약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대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오는데 순종하지 않습니다. 내 수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수준에서는 가능합니다. 내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준에 맞추어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면 내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순종은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안 되지만 하나님의 수준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내 수준에 맞추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순종의 대표적인 사례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결혼식이 한창인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예수님이 종들에게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히 채우라고 하십니다. 종들은 그대로 합니다. 이 항아리 물은 밖에 나갔다가 온 사람들이 손, 발을 씻는 물입니다. 먹는 물이 아닙니다. 두 세통 드는 항아리라고 했습니다. 한 항아리에 80-120리터의 물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돌 항아리가 6개 있었습니다. 잔치로 바쁜 종들이 약 600리터의 물을 퍼 날라야 합니다. 지금처럼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던 때가 아닙니다. 우물에서 물을 퍼 와야 한다면 보통 수고로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우물이 마을 밖에 있었다면 적어도 500m은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왔다갔다 적어도 1km입니다. 그런데 종들이 물을 아구까지 채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자아와 내 생각을 깨뜨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사오라고 해야지 왜 물을 채우라고 하지!” 도대체 남득이 안 되는 명령입니다. 말씀 앞에서 내 경험과 지식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물을 떠서 손님들에게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종들은 또 그대로 합니다. 먹는 물이 아닙니다. 손, 발을 씻는 물입니다. 그런데 종들은 시키는 대로 그 물을 떠서 손님들에게 갖다 줍니다.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손님들에게 씻는 물을 준 사실을 알고 주인이 때릴 수도 있습니다. 당시 종들은 주인에게 맞기도 했습니다. 맞아서 죽기도 했습니다. 순종했을 때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종들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종들의 행동이 정말 놀랍습니다.
다음 단계는 기적을 체험하는 단계입니다. 포도주가 굉장히 맛이 있고 질이 좋았나 봅니다. 손님들이 칭찬합니다. 사람들은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몰랐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2장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연회장은 잔치의 책임자입니다. 책임자가 모르는 사실을 종들이 알고 있습니다. 종들이 알았다는 말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종들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종들이 물만 채워놓고 떠서 갖다 주지 않았다면 물은 물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끝가지 순종하지 않으면 물 같은 신앙이 됩니다. 우리도 절대 순종을 통해 이 종들의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니까 삶에서 이런 일이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니까 힘이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십시오. 절대 순종하십시오.
예레미야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멜이 오기 전에 말씀하셨고, 하나멜이 오더니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에게 지금 장난하느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1951년 제작된 대작 영화 <쿼바디스>(Quo Vadis)의 명장면 중 하나가 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베드로와 고아 소년 나자리우스가 로마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때 나무들 사이로 강렬한 빛이 베드로를 비춥니다. 그때 소년이 말을 합니다. "만약 내 백성을 버린다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가겠노라." 베드로는 소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 음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자 자신을 향한 엄중한 책망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소년에게 방금 한 말을 다시 해보라고 다그칩니다. 나자리우스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라고 하며 어리둥절해합니다. 베드로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 소년의 목소리가 예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베드로는 환상 속의 주님을 향해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며 울부짖습니다.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베드로는 소년의 목소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갈등과 방황으로 번민하고 있을 때 담 너머에서 이웃집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노래 가사가 어거스틴의 귀에 “톨레 레게, 톨레 레게”(집어 들어 읽어라)라고 들렸습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계속 노래로 반복되었던 말은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Tolle lege, Tolle lege)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눈물을 그치고 안색을 고치어 어린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할 때 저런 노래를 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에 그런 노랫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섰습니다....“ 어거스틴은 톨레 레게라는 말을 따라 성경책을 들어서 펼쳤습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이 보였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아이들의 소리를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톨레 레게를 들었던 순간이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인정합니다. 잠자는 어거스틴의 영혼을 깨운 것은 어린 아이들의 노래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뛰어갔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7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해변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이디온입니다. 파이디온은 어린 아이라는 뜻입니다. 7세 이하의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소년, 소녀, 아이라는 뜻의 파이스의 지소사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디온은 우리말에 송아지나 강아지와 같이 어린 아이를 애정이 담긴 말로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아가야!’라고 사랑스럽게 부르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부모가 나이에 상관없이 자식을 ‘아가야’라고 부를 때가 있습니다. 먼저 너무 사랑스러울 때 부모는 자식을 “우리 애기!”라고 합니다. 또 무엇을 너무 잘해 대견스러울 때 “우리 애기, 잘 했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아주 힘써서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돼 의기소침해 있을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 애기, 고생했어. 수고했다.”라고 합니다. “얘들아”라는 말을 어떤 설교자는 “귀공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그물을 주님께서 여러분 곁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해 부르십니다. “얘들아! 애썼다.” 고기가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그랬더니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때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은 물고기를 잡는 순간 주님의 음성인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섯 명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도 주님인지 몰랐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와 하나멜은 매매 계약서를 두 개 작성했습니다. 하나는 원본이고, 다른 하나는 사본입니다. 예레미야는 매매 증서를 시위대 뜰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12절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매매 증서를 바룩에게 주었습니다. 매매증서를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내가 땅을 샀다고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자랑하고 알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왜 그랬을까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지금은 나라가 망하지만 우리나라가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가 망해 이 땅의 가치가 없지만 다시 이 땅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땅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예레미야는 밭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산 것입니다. 밭이 아니라 내일을 산 것입니다. 미래를 산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나라가 망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사놓은 땅에서 농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확신을 갖고 밭을 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의심하고 희망을 잃어버렸을지라도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여전히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5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바룩은 예레미야의 매매증서를 들고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예레미야와 같은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지구가 멸망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아무리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내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결코 어떤 순간에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 내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스피노자가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퍼스트 네임이 바룩입니다. 바룩 스피노자입니다. 바룩은 BC 600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스피노자는 1600년대 사람입니다. 스피노자는 유대인입니다. 틀림없이 스피노자는 바룩의 후예일 것입니다. 나라가 망할 때 예레미야의 예언을 믿고, 예레미야처럼 소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바룩입니다. 2200년이 지났는데도 그 후손이 똑같이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서 여자가 웃으면 남편도 자식들도 심리적으로 편안하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반대로 여자가 찡그리고 있으면 남편도 자식들도 이 집은 불안하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엄마의 편안함이 자식을 편안하게 하고 엄마의 불안이 자식을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샬롬이 유전되고, 어떤 가정은 불안이 유전됩니다. 어떤 가정은 감사가 유전이 되고, 어떤 가정은 원망이 유전됩니다. 바룩의 후예들은 대대로 소망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널이라는 사람은 “소망은 눈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속으로는 웃을 수 있고, 코로는 한숨을 쉬지만 마음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고통하는 영혼에게 내적인 기쁨과 위로를 충만하게 선사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플라톤은 "소망은 인간의 영혼에 있는 별빛이다."라고 했습니다.
멕시코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천국 땅 판매 허락을 받았다며 브로셔를 제작했습니다. 하늘 위의 고급 주택 그림과 함께 비자, 마스터카드, 구글 페이, 애플 페이로 결제 및 할부가 가능하다는 황당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풍자이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땅이 있습니까? 저는 천국에 땅이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천국의 땅을 샀습니다. 여러분도 천국의 땅을 사십시오. 천국의 땅은 삼성카드, 현대카드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글 페이로도 안 됩니다. 초고액 자산가와 극소수 초청된 고객에게만 발급되는 VVIP 최상위 신용카드인 블랙카드로도 살 수 없습니다. 천국의 땅은 믿음 카드로만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의 최후 소망입니다. 예레미야가 땅을 사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한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 땅이 있다고 자랑을 합시다. 그러면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까요? 하지만 저는 천국에 땅도 있고 집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천국에 땅을 사십시오. 여러분! 내일을 사십시오. 여러분! 내일의 밭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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