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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아주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또 교회를 욕하는 지독한 독설가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는 자신의 비참함과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딸 이민아 씨가 실명했습니다. 이민아 씨는 10여전 전에 갑상선 암 수술을 세 번 했습니다. 이어령 씨는 소식을 듣고 딸이 사는 하와이로 급히 건너갔습니다. 딸이 눈이 멀어 헛손질을 하는 거예요.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딸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더래요. 그 딸이 소원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뭐냐고 했더니 아빠가 교회 나가는 거래요. 한 번만이라도… 그게 꿈이라는 겁니다. “그래. 내가 지금 뭘 못 들어주겠니. 교회에 나갈게.” 이처럼 자식이 원하는데… 그래서 평생 처음 진심으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조그만 교회였는데 너무 행복해 보이더래요. 서로 손을 붙잡고 찬양하는데 창피해서 못하겠더래요. 그래도 딸이 원하니까 따라서 했습니다. 목사님이 소원을 하나 말하라고 하더래요. 여럿이서 빌면 성령님이 내려오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릎 꿇고 처음으로 주님께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어령 씨는 작은 교회의 골방에 들어가서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이렇게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게 해주시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기도 후에 딸이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귀국해서 서울대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완전히 정상인데 왜 그러냐고 해요. 미국에서 수술이 불가능했거든요. 이어령 씨는 당황했습니다. ‘아이쿠, 이제 난 끝났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걱정이 됐습니다. 목사님이 “이제 믿으시는 거죠?”라고 물었는데 “아직 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니 못 믿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눈만 뜨기만 하면…’이라고 했는데도 자꾸만 거부를 하는 겁니다. 근데 결정적인 순간은 그 다음 날에 찾아왔습니다. 딸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새벽기도 하러 가면서 교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이더래요. 그때 ‘나 세례 받을 게’ 이 한마디만 해주면 딸아이한테 일평생 가장 행복한 아침이 될 것 같더래요. ‘내가 이걸 못 해주겠느냐, 네가 이렇게 살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너 목사님 만나면 나 세례 받는다고 그래라.”라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오더래요.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이어령 씨가 세례를 받는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마침 그 예배에 일간지 기자가 한 명 참석했습니다. 다음 날 기자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습니다. 영성은 지성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 위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성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너머에 있습니다.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으면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 믿으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과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걷는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에게 교회사에 영원히 남을 말을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앉은뱅이는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기적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말 한 마디로 태어나서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서 걷고 뛰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 이름은 신비이고, 능력이고, 권세입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을 붙잡고, 의지하며 사십시오. 묶이고, 막히고, 아픈 일들이 있다면 그냥 아파만 하지 마시고 베드로처럼 큰 소리로 예수 이름을 선포하십시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이름으로 공문을 내려 보내면 하래에서 대통령의 사인을 보고 집행을 합니다. 대통령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되는 거예요. 예수 이름에 하나님의 사인이 있습니다. 어려움 때문에 주저앉는 삶의 앉은뱅이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이름을 주신 이유는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내게 있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이름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이름이 있습니까? 그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걷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4장의 배경이 되는 3장의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부활을 전하고 가르치자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아주 싫어했습니다. 1-2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사도들이 부활 전함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 대부분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 내세, 영혼, 천국, 지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사두개인의 특징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현대인들과 똑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오디세이, 판타지에 열광합니다. 그런데 오디세이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입니다. 성경은 비현실적이라고 믿지 않는데 신화, 판타지에는 열광합니다. 판타지에 황홀해해요.
세상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책이 출애굽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혹독하게 종살이를 했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괴롭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에서의 생활은 사탄의 권세 아래서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모형, 영적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자 바로가 못나가게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재앙으로 바로와 애굽을 치십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물이 피가 되고, 전염병이 퍼지고, 불 섞인 우박이 내리는 등 여러 가지 재앙으로 나라가 초토화 되고, 거기다가 메뚜기 떼가 애굽을 습격할 것이라는 또 하나의 재앙이 예고됐는데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바로는 있는 힘을 다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붙잡아놓으려고 합니다. 이는 사탄에 매여 있는 사람에게 구원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항의를 합니다. 출애굽기 10:7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나라가 망했는데도 바로는 이스라엘을 놔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바로 왕처럼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훼방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교회 오는 자체를 싫어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서 온갖 방해를 합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영혼 구원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건인지 구약은 출애굽 사건으로 구원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세례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에 비유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바다를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름 초에 에어컨을 켰는데 물이 떨어져요. 에이에스를 불렀습니다. 기사가 올라가서 에어컨을 열더니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고무 패킹을 하나 빼서 보여주며 “이게 문제예요.”라고 해요.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이거 얼마 안 해요. 제가 비싸요.”라고 해요. 고무 패킹 몇 백 원 할까요? 그런데 수리비로 85,000원을 받는 거예요. 나머지는 인건비예요.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건비를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100조가 될까요? 측정불가입니다. 그렇게 이루신 구원을 우리가 얼마면 살 수 있을까요? 돈으로 환산한다면 아무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공짜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이 무료입니다. 구원은 무료이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싫어하다는 말이 ‘디아포네오마이’입니다. ‘디아포네오마이’는 ‘심히 격노하다’, ‘크게 분개하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다(불안해하다)’라는 뜻입니다. 너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화를 내며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왜 이렇게 싫어했을까요? 죽은 자의 부활은 사두개인들의 신앙과 교리를 통째로 흔들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으면 부활한다는 전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사두개인들의 신앙과 삶을 그냥 흔들어버렸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흔들어버립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진리입니다. 믿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박해의 효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이 없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믿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3-4절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었더니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다 없어졌다.’ 이렇게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됐습니다. 박해가 있었는데 믿는 자들이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은 세상 물결에 떠내려가지만 산 신앙은 세상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규황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법이지만, 좋은 일엔 반드시 나쁜 일이 수반되고 나쁜 일에 반드시 좋은 일이 수반된다. 그리고 사람은 대개 좋은 일에 수반되는 나쁜 일을 통해 좀 더 나빠지며, 나쁜 일에 수반되는 좋을 일을 통해 좀 더 좋아진다.” 좋은 일이 생기면 꼭 나쁜 일이 같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나쁜 일 때문에 좋은 일이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일이 나쁜 일 때문에 나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에도 좋은 일 후에 나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나쁜 일 때문에 좋은 일이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좋은 일이 나쁜 일 때문에 더 좋아졌습니다. 우리 신앙, 우리 인생이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일에 마가 낀다고 합니다. 호사다마. 마자가 마귀 마자입니다. 마가 낀다는 말은 마귀가 낀다는 뜻입니다. 마귀가 방해해도 진짜 믿음은 나빠지지 않고 더 좋아집니다. 좋은 일에 마가 끼어도, 마귀가 방해를 해도, 여러분의 인생과 신앙이 나빠지지 않고 더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다음 날 산헤드린 공의회가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식으로 말한다면 국회가 모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다고 국회가 모인 것입니다. 5-6절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관리들이라는 말은 통치자들(ruler)라는 뜻으로 대제사장을 중심한 산헤드린 공의회를 가리킵니다. 국회입니다. 장로들은 지방 대표들입니다. 또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였습니다. 유대는 종교사회였습니다. 이들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입니다. 사도들이 전도했다고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이 다 모인 것입니다. 참 우스운 일입니다. 국회의원과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이 다 모여서 사도들을 세워놓고 청문회를 시작했습니다. 7절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국회가 급하게 모인 목적이 사도들에게 왜 착한 일을 했느냐고 따져 묻기 위해서입니다.
얼마 전 월드컵이 끝나고 참 웃긴 일이 국회에서 있었습니다. 홍명보 감독을 비롯한 몇 명의 축구협회 관계자들을 국회에 불러놓고 청문회를 했습니다. 어떤 의원이 축구 경기에서 졌다고 청문회를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축구 협회가 잘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감사를 해야죠. 그렇다고 월드컵에서 졌다고 국회에서 감독을 불러 청문회하는 일도 웃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의원은 노골적으로 왜 졌느냐고 질타를 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도 했지만 어쨌든 경기에 졌다고 청문회를 하는 것도 참 웃픈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청문회에 연예인들이 나오는데 솔직히 저는 왜 그 사람들이 거기에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회가 그렇게 할 일이 없나요? 그런데 이 보다 더 웃긴 일은 죽은 자의 부활을 전했다고 잡아서 옥에 가두고, 국회와 국가의 최고 권력자들이 다 모여 청문회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최고 권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8-9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에서 숨어서 지켜봤습니다. 겁쟁이였습니다. 대제사장의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당신도 예수당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하찮은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최고 기관과 최고 권력자들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우리를 잡아 옥에 가뒀는데 그 이유가 병자에게 행한 이 착한 일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했기에 옥에 가두고, 심문을 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인을 했느냐? 도둑질을 했느냐? 아니면 폭행을 했느냐? 지금 우리가 감옥에 갇힌 이유가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를 고쳐준 착한 일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웃긴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불과 두 달 전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국가 최고 권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도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했습니다. 이 담대함이 어디서 왔을까요?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성령 충만함에서 왔습니다. 기독교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담대함입니다.
아가서 6: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여자는 술람미 여인입니다. 술람이 여인은 농부입니다. 목동입니다. 들판에서 일을 해서 얼굴이 검게 탔습니다. 명품 옷, 명품 신발, 명품 백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을 아침 빛 같이 뚜렷했고, 깃발을 군대 같이 당당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신약의 성도, 교회를 상징합니다. 당당하고 담대한 기독교를 상징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착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제거해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죄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착한 일 때문입니다. 비교하기는 싫지만 석가가 이렇게 했습니까? 공자, 맹자, 아니면 마호메트가 이렇게 했습니까?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민아 씨는 암에 두 번 걸리고, 이혼을 두 번 하고, 아들이 죽고, 실명을 했습니다.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이어령 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난 괜찮아. 하나님이 많은 걸 보여주셨어. 난 각오가 되어 있어. 걱정 마.” 고통 앞에서 누가 이민아 씨에게 이렇게 담대함과 평안함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착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땅에 수많은 종교가 존재합니다. 그 많은 종교 중에서 기독교보다 착한 종교가 있습니까?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사람들을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또 참 평안과 안식을 줍니다. 100년 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필리핀보다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지난 세기 우리나라의 발전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 유수한 대학들을 세웠습니다. 병원을 짓고, 사회복지 시설을 지었습니다. 우리나라 종교계가 담당하는 민간 사회복지 사업 중, 기독교(개신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50% ~ 80% 선으로 집계됩니다. 이는 국내 종교계(개신교, 불교, 가톨릭, 원불교 등) 중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법보(불교)신문에 나온 기사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발표한 ‘한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각 종교계가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은 전체 529곳 가운데 개신교가 259곳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비율로 계산하면 49.0%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음으로 불교계 사회복지법인이 152곳으로 28.7%를 차지했다. 이어 가톨릭은 97곳(18.3%), 원불교 14곳(2.6%), 기타 7곳(1.4%)으로 조사됐다.” 현재는 불교, 천주교 이렇게 많지만 1980년대는 불교, 천주교 합해서 1%도 안 됐습니다. 1980년대에는 97% 이상을 교회에서 했습니다. 대한민국 근대화에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새마을 운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가나안 농군학교의 고(故) 김용기 장로님입니다. 우리 사회에 기독교보다 착한 종교가 있었습니까?
정주영 회장은 전 세계를 무대로 건설, 자동차, 조선 등 굵직한 사업을 개척했습니다. 그는 유럽이나 미국 등 당시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며 물질적·도덕적 풍요를 누리던 선진국들의 공통점으로 기독교 문화를 주목했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국가들이 정직하고 근면하며, 시스템이 투명하게 작동해 부강해졌다는 점을 기업가의 시각에서 분석한 것입니다. 정주영 회장 본인은 평소 "내 종교는 부모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비신자였으나, 사업을 위해 전 세계를 무대로 뛰며 각국의 사회적 특징을 예리하게 관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선진국들의 강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신뢰 이면에 기독교적 정신(근면, 정직, 성실)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인상 깊게 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너무나 유명한 일화입니다. 다섯째 동생인 정신영 씨의 요절 이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정 회장은 동생 부부가 다니던 정동제일교회에 온 가족을 이끌고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영향으로 현대가는 유교적 가풍 속에서도 정몽준, 정의선 등 많은 자손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집안의 주요 결혼식도 정동교회에서 치르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병상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임종 세례를 받으며 정식으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보다 착한 종교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교회 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이어령 박사님은 교회를 컴퓨터 자판에 비유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판은 내 아날로그 세계를 사이버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자판이 조금 부실하고, 잘못되었을지라도 본질적인 기능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판이 망가진 교회를 보고 컴퓨터 자체(기독교)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통로입니다. 현관입니다. 교회 자체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최후의 방은 아닙니다.” 이어령 씨가 기독교를 경험하고 한 말입니다. 제 컴퓨터 자판기가 오래 됐습니다. 오래 쓰다 보니 몇 군데 철자가 지워졌습니다. 컴퓨터에 꼽는 USB 포트가 접촉 불량인지 어떤 때는 입력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USB 포트를 뽑아 단자(소켓) 여기저기 꼽아보면서 되는 곳을 찾기도 했습니다. 자판을 두드려도 컴퓨터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컴퓨터가 먹통이 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판이 잘못됐다고 컴퓨터까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잘못할 수 있고, 성도가 잘못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아니고, 하나님이 잘못된 분이 아니며, 천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이 있고, 죽은 자의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목사나 옆에 있는 성도의 부족함을 보고 절대로 실망하지도 마시고, 절대로 신앙을 버리지도 마십시오. 사람의 실수 때문에 실족하지 마십시오.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십시오. 연약한 성도를 보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 다니지!”라고 하지 마시고, “저런 사람도 교회를 다닐 수 있구나! 하나님이 저런 사람도 받아주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놀랍네!”라고 하십시오. 예수님은 사람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 모든 종교 중 가장 착한 종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가 썩었다고 하고, 목사가 나쁘고, 교인들이 나쁘다고 해도 기독교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자판기인 교회 때문에 본체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기독교는 착한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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