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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우리 시대의 유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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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7~12
주일오전예배 | 2026-08-2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유두고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에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드로아는 튀르키예 서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16장) 중에 드로아에서 동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그때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봅니다. 환상을 보고 바울이 사역의 방향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꾼 곳이 드로아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에 드로아에 들립니다. 바울이 한 성도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말씀을 전하는데 창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던 유두고가 졸다가 아래로 떨어져 죽습니다. 예배 중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바울과 성도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바울은 유두고를 위해 기도한 후에 설교를 계속했고, 설교 중에 유두고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은 유두고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예배 중에 여러분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7절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그 주간의 첫날에”라고 했습니다. 그 주간의 첫 날은 일주일의 첫 번째 날로 오늘날의 일요일, 주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6:2에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는 이 날을 ‘안식 후 첫날’이라고 했고 AD 55년경에는 ‘일주일의 첫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D 95년 즈음에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10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때부터 교회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일은 주님이 주인이신 날입니다. 주일은 그 분이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근거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이 세상 어떤 누구보다도 귀중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인정한다면 다른 일 때문에 예배를 빼먹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날이라면 친구, 자식 때문에 교회를 빠지면 안 되지 않을까요? 말은 주일이라고 하는데 주일을 빠지는 것은 말로만 주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에 주일이 주님이 가장 중요한 첫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은 교회가 주일에 예배하기 위해 모였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의식이 아닌 하나님과 성도 간의 사귐과 나눔인 '코이노니아(Koinonia)'로 이해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사귐, 교제, 나눔, 참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모인 사람들 간의 영적 교제와 참여를 의미합니다. 이는 예배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수평적인 성도 간의 공동체적 나눔이 하나로 연결된 삶의 예배였음을 뜻합니다. 이 날에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성찬과 애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교제를 나눴습니다. 주의 날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영적 사귐이 있는 날이고, 수평적으로는 이웃과 교제와 나눔이 있는 날입니다. 초대교회의 이 코이노니아의 은혜가 우리 교회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강론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디알레고마이입니다. 디알레고마이는 ‘토론하다’, ‘대화하다’, ‘논의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설교를 강론, 토론, 질문 등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주간의 첫 날에 떡을 떼려고 모였습니다. 이를 테면 교제를 나누려고 모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를 코이노니아로 이해했는데 코이노니아는 당시 예배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강대상을 보고 일직선으로 앉아있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은 형태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일방적인 설교를 듣지 않았습니다. 함께 성경을 읽고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교제하는 식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함께 모여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문이 있으면 수시로 질문을 하는 등 토론하고 다시 설교를 들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참여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교제 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울이 말을 밤 중까지 계속했다고 했습니다. 예배도 아주 길었고, 설교도 많이 길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너무 갈급했고, 은혜를 너무 사모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감리교회에서 목회하시던 최영식 목사님이 중국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교회의 첫 번째 설교 요구 조건이 무조건 길게 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내용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들어달라고 하더랍니다. 중국 교회가 은혜를 얼마나 사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드로아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모했습니다. 예배를 너무 사모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예배 중간에 집에 다 갈지도 모릅니다. 제가 설교를 10분만 길게 하면 속으로 한 마디씩 하시죠.

 

8절에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라고 했습니다. 9절에는 모인 곳이 3층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시대 드로아 지역의 건물은 1층은 벽돌로 지었고, 위층은 가벼운 나무로 지었습니다. 나무로 지은 위층에는 붕괴 사고가 많았습니다. 상하수도의 사용이 자유롭고,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고, 붕괴의 위험이 없는 1층은 값이 비싸 행정관 법률인 등 부자들이 살았고, 위층은 가난한 서민들이 살았습니다. 드로아 지역에 가장 높은 아파트(인술라)가 3층이었습니다. 3층은 가장 가난한 하층민들이 살았습니다. 3층에서 예배를 드린 것을 보면 가난한 성도 중에 한 사람이 자기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한 것 같습니다. 그 시대의 성도들에게 예배의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임이 중요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는 지붕에서 기도했고, 16장의 빌립보 사람들은 강가에서 기도했습니다. 15장 16절에 하나님께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장막은 텐트입니다. 비나 겨우 피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금으로 칠한 그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이나 모세의 성막이 아니라 초라했던 다윗의 천막(텐트)을 그리워하십니다. 사도행전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왜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그리워하실까요? 다윗은 법궤 앞에서 속살이 보일 정도로 뛰고 기뻐하고 어린이처럼 노래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아내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더 낮아져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예배자의 예배 태도, 마음이 중요합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드로아 교회는 가난한 서민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밤이 새도록 뜨겁게 기도하며 예배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윗의 장막처럼 순전하게 예배하는 곳이 되고, 드로아의 3층 다락처럼 뜨겁게 기도하는 곳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당시에는 등불을 켤 때 올리브 기름을 사용했는데 값싼 올리브 기름은 그을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많은 등불을 켰기 때문에 방안의 공기가 탁해 창문을 열어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창문은 건물의 하중 때문에 지금처럼 크게 만들 수 없었기에 방안의 공기는 그리 신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의 설교는 엄청나게 길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에서 바울은 나는 말에는 졸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신학적으로 뛰어난 학자였지만 훌륭한 설교가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드로아 지역의 일몰 시간은 7시이고, 해 뜨는 시간은 5시였습니다. 그들은 저녁 7시 정도에 모여 새벽 5시까지 바울에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임이 10시간 동안 계속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신앙의 열기가 정말 놀랍습니다.

 

그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창문에 앉아서 졸다가 그만 떨어져 죽었습니다. 9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유두고는 '행운', '운이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이 좋습니다. 하지만 유두고는 종이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당시 노예나 하층민들에게 흔하게 쓰이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유두고를 종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유두고는 종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일 예배에 참석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주일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자체가 엄청난 헌신이었습니다. 청년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네아니아스입니다. 네아니아스는 15세 이상의 젊은이(소년, 청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랜 동안 등불을 켜서 방안의 공기가 탁하고 답답했고, 유두고는 하루 종일 일을 해서 피곤했습니다. 소년이었던 유두고는 졸음을 참기 힘들었습니다. 유두고는 신선한 바깥 공기로 잠을 깨우기 위해 창문으로 가서 걸터앉았습니다. 몸의 일부는 안에 있었고, 몸의 일부는 밖에 있었습니다. 시원한 바깥 공기가 잠을 깨워줬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는 못해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유두고 몸의 일부는 교회 안에 있었지만, 일부는 교회 밖에 있었습니다. 한쪽 귀에는 바울의 설교가 들렸고, 다른 한쪽 귀에는 밖에서 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두 소리가 동시에 들렸습니다. 바울을 쳐다보다가 흘끗흘끗 밖을 쳐다보았습니다. 밤하늘의 별도 바라보았고,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감기는 눈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유두고는 안으로 떨어졌을까요? 밖으로 떨어졌을까요?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NIV 성경은 땅바닥에 떨어졌다(he fell to the ground from the third story)고 번역했습니다. 몸이 밖으로 더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몸이 밖으로 쏠려 밖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몸이 밖으로 많이 나갔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몸을 조금만 밖으로 내놨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점점 밖으로 많이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다가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100프로 믿으십니까? 혹시 반은 믿고, 반은 안 믿는 것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은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반은 교회에 있고, 반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유두고처럼 반은 하나님께 걸치고, 반은 세상에 걸친 것 아닙니까? 교회 창문에 걸터앉은 것은 아닙니까? 한쪽 귀로는 말씀을 듣고, 다른 한쪽 귀로는 세상 말을 듣는 것은 아닙니까? 한쪽 눈은 주님을 바라보는데, 다른 한쪽 눈으로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남녀관계에서 양다리 걸치기처럼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누어진 마음, 나누어진 귀, 나누어진 눈은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일입니다. 생각이 나누어지면 제대로 공부도 할 수 없고, 제대로 일도 할 수 없고, 예배도 온전히 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로 완전히 들어오십시오. 하나님께 반만 걸치지 마십시오, 한 손만 잡지 마세요. 두 손으로 잡으세요. 창문에 걸터앉지 마십시오. 벽에 수건을 걸어놓듯 적당하게 걸어놓지 마십시오. 안으로 완전히 오십시오.

 

사람은 있는 자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대부분 젊은데 40대 중년의 큰 형님 정도 되는 분이 한 분 있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 두고 늦게 신학교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집에서 전도를 하다가 그들과 어울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취하게 됐고, 자신의 연약한 모습에 실망해 자퇴를 한 것입니다. 술집까지 뛰어들어간 그분의 열정이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분이 전도하기 위해 주로 머물던 곳이 술집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올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결심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한 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자리가 사람을 만듭니다. 맹자가 사는 곳이 묘지 근처였습니다. 맹자는 친구들과 장사 지내는 놀이를 했습니다. “어허 딸랑” “어허 딸라.”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맹자는 물건 파는 흉내를 내며 놀았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맹자는 글을 읽는 흉내를 내며 놀았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안심을 하고 거기에 정착을 했습니다. 맹자가 그대로 묘지 근처에 살았다면 훌륭한 장의사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시장에 살았다면 큰 사업가가 됐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서당 근처로 이사 가서 역사에 길이 남는 사상가가 됐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듭니다.

 

여러분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입니까? 아니면 쾌락의 장소입니까? 핸드폰 앞입니까? 유튜브 앞 아니면 게임, 텔레비전 앞입니까? 그 자리가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만들고 있습니다. 떠나십시오. 자주 찾는 자리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핸드폰을 들고 공부하거나 일할 수 있습니까? 양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자리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위험한 자리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앉은 자리는 설교자도 보이고 세상도 보이는 전망이 좋은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양다리 걸치지 마십시오. 한 세계를 포기하십시오. 집중하십시오.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다윗 시대 예루살렘의 가옥 구제는 계단식이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래 집 마당이 훤히 보였습니다. 밧세바는 왜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목욕을 했고, 왜 하필 다윗은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을까요? 자리를 이길 수 없다면 그 자리를 벗어나세요. 하나님 앞으로 오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오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에 계십시오. 하나님께만 집중하세요.

 

 

예배드리다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정말 큰 일입니다. 떠들지 말라는 말은 소란피우지 말라, 야단법석을 떨지 말라는 뜻입니다(도뤼베오마이). 사람들이 많이 놀라 꽤 소란을 피운 것 같습니다. 바울이 달려 내려갔습니다. 상황이 급박했습니다. 바울은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유두고를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시체를 3층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체 위에 엎드려 시체를 끌어안고 기도 했습니다. 이 기도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한 기도입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자 아이 위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입을 죽은 아이의 입에, 자신의 눈을 아이의 눈에, 자신의 손을 죽은 아이의 손에 대고 아이 위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입으로 자신의 숨결을 죽은 아이의 입에 불어넣고, 자신의 체온을 아이에게 전달하려는 몸짓입니다. 몸으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아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몸짓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사의 몸부림치는 기도를 받으시고, 아이를 살려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을 입기 때문에 시체를 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시체를 만진 정도가 아니라 시체 위에 엎드려서 시체를 끌어 앉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속에 예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시체로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예수 생명이 상대에게 전달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바울이 죽은 소년 위에 엎드려 소년을 끌어안은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소년에게 전달돼 살아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이 유두고에게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생명의 능력이 나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누군가를 만지거나 무엇을 만지면 그 사람이나 물건은 부정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러워지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에게서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나가서 여인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이 세상 어떤 더러운 것도 예수님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이 세상의 어떤 죄도 완전히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상처입고, 아프고, 고통당할 때 십자가를 의지합시오. 그러면 십자가의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여러분의 아픔을 깨끗하게 치료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까? 그 생명이 여러분의 가족에게, 자녀에게, 이웃에게 전달되기를 소원하십시오. 생명이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생명을 전염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가슴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 십자가가 이웃에게 전달되기를 소원하십시오.

 

기도 후에 바울은 생명이 그에게 있으니 소란피우지 말라고 합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유두고는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는데 바울이 인공호흡을 해서 깨어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가 죽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도 후에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유두고에게 전달됨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계속했고 유두고는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예배가 중단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 선포도 중단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가 계속 되기를 원하시고, 복음이 계속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유두고로 인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12절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위로를 받았다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칼레오입니다. 파라칼레오는 ‘위로로써 힘과 용기를 돋우다’, ‘기운을 북돋우다’라는 뜻입니다. ‘위로를 받았다’는 말은 ‘힘과 용기가 생겼다’, ‘기운이 났다’는 의미입니다.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적지 않게’라는 말이 ‘헤아릴 수 없게’라는 뜻입니다. 아주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 유두고 때문에 사람들이 한없는 힘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낙심했던 사람이 다시 기운을 얻었습니다. 유두고 때문에 사람들이 한없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서양에서는 직업이 이름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Taylor라는 성은 조상이 재단사(옷을 만들던 사람)였음을 나타냅니다. Baker는 조상이 제빵사임을, Carter(카터)는 조상이 마부(수레로 물건을 운반하던 사람)였음을 뜻합니다. 한 마을에 지미라는 사람이 세 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미 더 테일러, 지미 더 베이커, 지미더 카터라는 식으로 사람을 구분했습니다. 나중에는 이것이 정식 이름이 됐습니다. 지미 카터.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슈어젠(Schwarzen)은 검은색을 에거(Egger)는 쟁기질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검은 땅을 일구는 농부라는 뜻입니다. 조상이 농부라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에 하나는 Smith입니다. 스미스는 대장장이(금속을 다루던 사람)라는 뜻입니다. 영미권에 스미스라는 성씨가 많은 이유는 과거에 마을마다 대장장이가 꼭 한 집씩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전 수상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의 대처는 중세 시대에 짚이나 갈대를 엮어 초가집 지붕을 얹는 사람을 뜻합니다. 대처 수상의 조상이 초가집 지붕을 만드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 이름에 그들의 조상의 흔적, 조상의 직업의 흔적, 인생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유두고의 이름에는 종의 흔적, 신분의 흔적, 직업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유두고는 '행운', '운이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행운’이라는 말을 기독교 식으로 바꾼다면 ‘은혜’가 됩니다. ‘운이 좋은’이라는 말을 기독교 식으로 바꾸면 ‘은혜가 좋은’ ‘은혜가 많은’이 됩니다. 유두고의 인생에서 행운이 은혜로 바뀌었습니다. 유두고는 죽었다가 운혜로 살아났습니다. 유두고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그의 이름에 종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그는 걸어 다니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자가 됐습니다. 믿으면 나처럼 부활한다는 광고판이 됐습니다. 기도하고, 은혜 받고, 치료받고, 새 힘을 얻어, 여러분의 인생에 유두고 같은 은혜의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유두고 같은 은혜의 광고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의 유두고가 되십시오. 우리 교회에 유두고 같은 역사가 있고, 저에게도 유두고 같은 은혜가 있고, 여러분에게도 유두고 같은 부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치유집회를 했습니다. 인천의 은혜기도원 원장님이신 김은혜 전도사님이 강사로 오셨습니다. 신유은사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설교 후에 안수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는 배에 안수를 받았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손이 지나간 자국이 배에 새겨졌습니다. 여러분들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때는 교회에 그런 신비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교회 어른들이 저보고 보여 달라는 거예요. 옷을 걷어서 제 배에 난 흔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줬습니다. 목사님도 보여 달라고 하셔서 목사님께도 보여드렸습니다. 이런 일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흔적이 남기를 바랍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한 노예의 삶이 뒤바뀌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찮은 노예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존재가 됐습니다. 배운 사람도,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사회에 유력한 인사도 아니었습니다. 한낱 노예에 불가합니다. 그런데 그 노예가 사람들에게 한없는 위로가 됐습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로를 받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힘을 얻고, 소망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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