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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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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18:21~35
주일오전예배 | 2026-08-0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봄에 새 싹이 나옵니다. 제가 봄에 저 녹보수에게 햇빛을 비춰주려고 롤스크린만 올렸다 내렸다 했습니다. 물은 일주일 한 번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가지의 끝부분이 마르는 거예요. 물이 부족한가 싶어 물을 자주 주었습니다. 그래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7월에 밖에 내놨더니 가지 끝이 살아나고 새싹이 나오는 거예요. 제가 한 번씩 롤스크린을 올려주었는데 그 정도의 빛으로는 부족했던 거예요. 가지 끝에 보이는 연두색이 7월 한 달 동안 나온 새싹입니다. 저걸 보면서 ‘식물은 햇빛을 받아야 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게 햇빛의 힘입니다. 사람도 햇빛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영혼의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햇빛이 사람의 진정한 힘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햇빛이 여러분을 향해 비추는 복된 시간입니다. 은혜 받으십시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살아갈 힘을 줍니다.

 

은혜는 용서의 바탕이 되며, 용서는 은혜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대표적인 결과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덮어주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용서에 공동점이 있다면 둘 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큰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때,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용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관해 여쭈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해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용서의 두 배에 한 번을 더해 일곱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랍비보다 더 많은 용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칭찬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 베드로야! 네가 나를 따라다니더니 랍비들보다 나은 신자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의 말씀을 하십니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을 일흔 번까지”라는 말은 7 곱하기 70으로 490번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7 더하기 70으로 77번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KJV 성경은 ‘490’으로 번역했고(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NIV는 ‘77’로 번역했습니다(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유대인은 7을 완전수로, 10은 충만한 수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용한 7이라는 완전수에 완전수 7과 충만 수 10을 곱한 70을 사용하심으로 용서는 계속 무한히 반복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말은 숫자를 세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숫자를 세는 순간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내가 두 번이나 참았다! 지난 번에 참고, 이번에 참고. 세 번째는 용서 못한다. 명심해라.” 수를 세는 용서는 참 용서가 아닙니다. 두고 보자고 벼르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그러더니 또 그러네. 참는 것은 여기까지야!”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를 가장한 협박입니다. 용서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는 것이 참 용서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490번까지는 용서하고, 491번째는 원수를 갚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490번은 용서하는 수를 세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잊는 것이 참된 용서입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는 말씀의 의미는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면서 수를 세시지 않습니다. 그냥 용서합니다. 딸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딸을 그냥 용서합니다. 몇 번을 용서했는지 기억하지 않습니다. 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뭐를 용서했는지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용서하면서 숫자를 세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언제든지 용서하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됐다는 뜻입니다. 밥을 먹으면서 몇 숟가락을 먹었는지 세는 사람은 없습니다. 김치를 먹으면서 몇 젓가락을 먹었는지 세지 않습니다. 음식을 세면서 먹지 않듯이 용서는 습관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밥을 먹듯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매일 밥을 먹지만 어제 뭐를 먹었는지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용서하는 그냥 것입니다. 사람은 밥 먹듯 죄를 짓고, 하나님은 밥 먹듯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면서 세시지 않으십니다. “수를 세지 말라.” 이것이 490번의 의미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를 관대함이라고 생각했고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를 관대함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수를 세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을 관대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용서는 숫자를 세지 않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든지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23절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용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종들 중에 한 종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당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1데나리온은 6천 명의 하루 품삯이고, 일만 데나리온은 6천만 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6천만 명이 안 됩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하루 일해도 채울 수 없는 돈이 1만 달란트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지금의 화폐로 환산이 어려운 돈입니다.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계산해보겠습니다. 현재 최저 시급이 10,320원입니다.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면 하루 품삯은 103,200원입니다. 1달란트는 현재 시가로 619,200,000원이고, 1만 달란트는 6조 1천 9백 10억입니다. 현재 막노동하는 인부들의 일당은 14만 원 ~ 16만 원입니다. 하루 일당을 15만원으로 계산하면 1달란트는 9억이고, 일만 달란트는 9조원입니다. 현재 돈으로 계산하면 이렇게 되지만 현재는 그때보다 돈이 많은 시대이기 때문에 당시 일만 달란트는 9조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을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종이 왕에게 왜 이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왕은 결산을 하면서 종에게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25절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하지만 종은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처자식까지 다 팔아도 갚을 수가 없어서 엎드려 참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종은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왕은 하나님이고, 종은 나 자신입니다. 종들은 이 땅의 모든 인류입니다. 죄는 인생을 파산하게 하고, 영혼을 파산하게 합니다. 죄는 인류를 완전히 파산하게 합니다. 세상은 죄 때문에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빚은 힘으로 갚을 수가 없습니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26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참으소서!”라는 말은 한 번만 참아달라는 의미입니다. 한 번만 참아주시면 다 갚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은 호언장담했습니다. 종의 태도가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종의 빚을 전부 탕감해줬습니다.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어떤 조건도 걸지 않았습니다. 탕감해준 이유가 불쌍해서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스플랑크논은 내장, 창자라는 뜻입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혹은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깊은 아픔과 긍휼을 뜻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고통, 질병, 주림을 보시고 깊은 연민을 느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공관복음, 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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