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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음식의 맛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맛이 있습니다. 전에 아내의 맛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맛이 있고, 자식의 맛이 있고, 친구의 맛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맛은 어떤 맛입니까? 단맛? 쓴맛? 매운맛? 신맛? 여러분은 단맛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도 맛이 있습니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맛은 어떤 맛일까요? 다양한 맛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 맛은 단맛입니다. 그 맛을 알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꿀이 정말 흐른다는 뜻이 아니라 달콤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왜 달콤할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삶에 달콤한 맛이 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달콤한 하나님의 맛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1절에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그리고 에훗이 죽었다.” 우리말 성경은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범죄한 것으로 번역했지만 원문 성경은 에훗이 죽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또’라는 말은 반복의 의미도 있지만 죄를 이전 보다도 더 많이 지었다는 증가의 의미도 있습니다. 에훗은 드보라 직전의 사사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민족의 영웅입니다. 에훗이 살아있는 중에 이스라엘이 범죄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푼 은혜를 잊고 범죄했다는 의미입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라고 했습니다. 에훗이 죽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범죄를 했어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즉시 징계하지 않으신 이유는 에훗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땅에 대한 심판을 뒤로 연기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건이나 말씀을 종종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입니다. 천사가 롯에게 소돔에서 빨리 나가라고 재촉합니다. 하지만 롯은 머뭇거립니다. 이때 천사가 롯에게 네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전에는 소돔을 멸망시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창세기 19:22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롯 때문에 잠깐이지만 연기됐습니다. 그런데 19:29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연기하신 이유가 사실은 아브라함 때문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서서 롯에게 내릴 심판을 막아섰습니다. 롯이 이 사실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몰랐습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거나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내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설 사람을 찾으십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시내산 아래에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음행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려 하시자 모세가 하나님을 막아섭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진노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재앙을 막아서서 멸망당하지 않은 일을 몰랐습니다. 내가 범죄했는데 심판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6장에 고라당의 반역이 나옵니다. 고라당의 반역으로 전염병이 이스라엘에 퍼질 때 아론이 향로를 들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자 전염병이 멈춥니다. 아론이 전염병을 막아섰습니다. 전염병이 향로를 들고 선 아론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향로가 상징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전염병이 기도로 막고 서 있는 아론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를 막아설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넓은 거리를 다니며 의인 한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스겔 22:30-31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가운데서 찾다가”라고 했습니다. 재앙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려고 애쓰시는 모습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인류에 내릴 하나님의 형벌을 막아서셨다는 증표가 아닙니까? 십자가 밑에 있으면 지옥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아래로 오십시오. 십자가 아래는 안전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내 가정에 재앙을 막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믿음의 사람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5대 왕인 여호람이 범죄했지만 하나님이 여호람을 멸하지 않으신 이유는 다윗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다윗 자손에게 등불을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에 멸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왕하8:19. 대하21:7).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아들은 아버지 여러보암 때문에 어려서 죽었습니다. 나 때문에 내 자녀가 재앙을 받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내가 내 집을 위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한 사람이 되세요. 하나님은 내가 이 땅에 내릴 재양을 막고 서기를 바라십니다. 에훗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됐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 은혜가 있었습니다.
에훗이 죽자 가나안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학대했습니다. 3절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학대하다는 말이 ‘쥐어짜다’, ‘짖누르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주를 짤 때 포도를 누르고 비틉니다. 야빈에게 20년 동안 포도 알처럼 비틀리고 쥐어짜듯 학대를 당해 삶이 아주 피폐해졌습니다. 죄가 증가하니까 학대도 심해졌습니다.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다’(차아크)는 말이 극한 상황의 고통과 슬픔, 억압으로 방성대곡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었습니다. 방성대곡을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의 기도입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계기입니다.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체념하고 삽니다.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팔자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운명도 아니고 팔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팔자는 없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으세요. 눈물을 흘리세요. 못 살겠다고 나 죽겠다고 울부짖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은밀한 일은 문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일’, ‘단절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베일에 가려 단절된 은밀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그 단절된 일이 내게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에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가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은 5:4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눈물이 희망입니다.
4절에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을 때에”라는 뜻입니다.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또 “그때에”라는 말은 “나라의 중차대한 위기상황에”라는 의미입니다. 사사 시대 340년(BC 1390-BC1050) 동안 이스라엘을 가장 학대한 왕은 가나안 왕 야빈이었습니다. 랍비돗의 뜻은 '횃불들', '번개들'이란 뜻입니다. 번개라는 말은 능력자라는 뜻입니다.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매우 어려울 때 능력있는 번개가 쓰임받은 것이 아니라 아주 연약한 꿀벌이 쓰임받았습니다. 나라의 위기 때에 쓰임받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번개 같이 강한 남자들이 아니라 꿀벌 같이 연약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다 어디에 있기에 여자가 쓰임받았을까요? 사사기 5:6-7에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큰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숨어서 다녔습니다. 남자들이 무기력하고 비겁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남자들이 비겁할 때 한 여인이 일어났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 뒤에서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거의 전무했습니다. 얼마나 남성들이 비겁했으면 죽은 듯이 살던 여성이 일어났을까요? 얼마나 쓸 만한 남자가 없었으면 하나님이 여성을 쓰셨을까요?
남자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각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 절대다수가 여자입니다. 기도하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이 여자입니다. 교회에 남자들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남자들의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각성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남성이 되십시오. 그리도인은 비겁하면 안 됩니다. 방관하거나 뒤에 숨는 비겁한 성도가 되지 맙시다.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남자들이 비겁하게 뒷골목으로 숨어 다닐 때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백성들을 재판했습니다. 5절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했다고 했습니다. 거주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솨브입니다. 야솨브는 ‘거주하다’, ‘머물다’, ‘앉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앉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시제가 미완료입니다. 드보라는 계속 앉아있었습니다.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종려나무를 드보라의 종려나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모세 오경, 성경입니다. 야빈 왕이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드보라가 말씀으로 백성들을 재판을 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왕은 야빈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세상 왕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 것입니다. 영국의 C. S.루이스는 “인생에서 단 하나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십시오.
지난 주간에 유튜브로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교회 장로님의 아들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장로님의 아들이 군 입대를 했습니다. 사단에 어떤 일이 있어서 부대 전체가 고사를 지내게 됐습니다. 장로님 아들이 대표로 선발이 돼서 절을 하게 됐습니다. 장로님 아들은 사단장께 교회 다니기 때문에 절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단장님은 종교의 자유가 있다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모두 고사에서 제외시켜주었습니다. 장로님 아들 한 사람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절을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얼마 후에 장로님의 아들은 청와대로 발령이 났습니다. 제대할 때까지 장로님 아들은 청와대에서 양복을 입고 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갔는데 이 간증을 하더래요. 어느 상황에서도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십시오.
또 재판을 받았다는 말은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식민지의 삶 속에서 말씀을 배운 것입니다.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야빈 왕의 학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시키고, 군비를 확장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드보라는 백성들에게 병법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민족의 위기를 영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종이 된 이유는 힘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군사를 모으기 전에 말씀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깨운 것입니다. 우리 삶에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허리에 있는데 다리가 아프다고 다리를 치료하면 다리가 나을까요? 낫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야빈의 학대로 백성들의 삶이 곤핍했을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옷이나 쌀이나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만을 주었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심방을 갈 때 쓰는 심방 용품이 있었습니다. 이사한 집에는 휴지를 가지고 갔고, 병원에는 음료수를 가지고 갔고, 개업을 하는 곳에는 화분을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렇게 합니다. 아산에 있을 때에는 돌 반지까지 했습니다. 일산에 있는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에는 심방용품이 아예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 여쭈었더니 목사는 말씀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심방 갈 때 성경만 들고 갔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 말씀을 먹는 곳이고, 목사는 말씀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올리브 나무도 아니고 무화과나무도 아닌 종려나무일까요? 이스라엘에는 세 종류의 꿀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석청입니다. 벌이 바위 사이에 만든 진짜 꿀입니다. 두 번째는 쥐엄나무 열매로 만든 시럽입니다. 세 번째는 종려나무 열매의 시럽입니다. 열매가 우리나라 대추를 닮았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대추야자라고 부릅니다. 세례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했는데 세례 요한이 먹은 석청은 종려나무 열매가 바위에 떨어져 만들어진 시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려나무는 꿀 나무입니다.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뜻입니다. 꿀벌이 꿀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법이 공의롭게 시행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꿀처럼 답니다. 꽉 막힌 가슴이 뻥 뚫립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을 하는 모습은 꿀벌이 꿀 나무 아래에서 꿀을 나누어주고 있는 형상입니다. 재판이 법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독처럼 아주 씁니다. 아모스 5:7에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재판이 바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쓴 쑥과 같은 것입니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서 재판을 한다는 것은 억압의 시대에 재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꿀처럼 달콤하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 것입니다.
우리나라 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법이 바로 시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은 독처럼 쓰게 됩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분통이 터집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AD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주화가 있습니다. 유대아 캅타(capta, 붙잡힌, 포획된)라는 화폐입니다. 유대아 캅타라는 말은 포로가 된 유대인이라는 뜻으로 이 화폐에는 유대인이 종려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사진). 종려나무는 평화, 안식, 번영, 자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자유와 안식과 평화의 나무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울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에 법이 바로 시행되도록 기도해주세요. 우리나라가 포로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코리안 캅타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아주 비옥하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젖은 사랑이고, 꿀은 공의, 정의입니다. 가나안은 사랑과 정의가 흐르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으로 마음이 녹은 땅입니다. 정의로 억울한 사람이 없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사랑과 정의가 흐르는 달콤한 땅입니다. 교회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마음이 녹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억울함이 풀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사랑과 꿀이 흐르는 달콤한 땅이 되어야 합니다. 또 교회는 종려나무입니다. 교회는 꿀 나무입니다. 꿀은 말씀입니다. 꿀은 복음입니다. 교회는 말씀이란 꿀을 먹는 곳입니다. 목사는 꿀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꿀은 돈이 아닙니다. 꿀은 이 세상 어떤 만족이 아닙니다. 꿀은 은혜입니다. 교회 오시면 꿀을 먹을 생각하십시오.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먹으십시오. 복음을 먹고 꿀벌이 되십시오. 복음의 꿀벌이 되십시오. 은혜의 꿀벌이 되십시오. 사랑의 꿀벌이 되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에게 꿀을 전하십시오. 고통의 때에 드보라는 백성을 위한 꿀벌이 됐습니다. 말벌이 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쏘는 말벌이 되지 마십시오.
드보라의 말씀 운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야빈 왕과 싸울 힘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드보라는 사람을 군대장관 바락에게 보내 불러다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바락의 손에 넘기셨다는 약속입니다. 6-7절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가 그를 네 손안에 주리라.”는 뜻입니다. 적의 군대장관이 네 손바닥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붙잡으면 삶의 문제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옵니다. 손안에 있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바락이 있는 납달리 게데스에서 드보라가 있는 베델까지는 100~130km입니다. 바락은 드보라의 말을 듣자마다 이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옵니다.
그런데 바락은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지 못합니다. 8절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좀 비약하면 “당신이 같이 안 가면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가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언니, 무서워서 못가니까 같이 가주세요. 그러면 저도 갈게요” 정말 못난 남자입니다. 군대장관이 이 정도였으니까 다른 남자들은 어떠했을까요? 드보라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드보라가 전쟁에 함께 가는 것은 전략적으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에게 민족의 운명을 거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바락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민족의 운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사람에게 운명을 걸지 마십시오. 말씀에 여러분의 운명을 거십시오. 하나님께 인생을 거십시오. 바락의 뜻은 번개입니다. 하나님이 번개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번개가 시스라의 철병거가 무서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의지해 믿음으로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번개는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신명기 32:41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번쩍이는 칼은 번개입니다. 하나님께서 번개를 나의 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22:15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 다윗은 번개를 하나님의 화살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3:11 “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번개를 하나님의 창이라고 했습니다. 번개는 하나님의 칼이고, 활이며, 창입니다. 칼과 창과 활의 공통점은 주인이 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번개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그런데 바락이라는 번개는 하나님의 명령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욥기 38:35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번개는 하나님만이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가고,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하나님의 번개가 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번개가 되십시오. 바락처럼 이름만 번개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맙시다. 내 앞에 있는 문제가 철병거 900대처럼 커 보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드보라가 무서운 말을 합니다. 9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방금 전에는 하나님께서 시스라를 바락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여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락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의 약속이 즉시로 변경되었습니다. 네가 전쟁의 수고를 하지만 그 승리의 영광은 다른 사람이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지 못하면 영광이 없습니다. 여러분! 말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누가복음 5장,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그때는 낮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투명 그물이 아니기 때문에 낮에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다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밤에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밤에도 잡지 못한 고기를 낮에 잡으라는 것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다는 말은 안 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못한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오직 말씀만 의지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물로 고기를 잡은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얼굴의 광채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특별한 영광이 있었습니다. 말씀의 영광이 얼굴에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그 영광이 너무 강열해서 수건으로 가려야 할 정도였습니다(출34:29-33).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말씀의 영광이 있습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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