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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는 <킹더랜드>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제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처럼 왕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드라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자주인공 이름은 구원입니다. 남자주인공은 이름처럼 폭풍우가 심하게 부는 날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여자 주인공을 헬리콥터를 타고 가서 구원합니다. 또 불행한 이복 누나의 삶이 구원으로 인해 조금씩 회복되어 갑니다. 여자주인공 이름은 천사랑입니다. 천사처럼 사랑이 많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시크릿가든>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 길라임입니다. 라임은 라임나무 열매입니다. 이 이름은 극중에서 드라마의 비극적이고 멜랑콜리한 주제와 운명적인 사랑의 서사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드라마의 성격과 주제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름에 스토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학 기법을 캐릭토님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캐릭터의 운명, 드라마의 주제 등을 담아내는 기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사용된 아주 오래된 문학기법입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시면서 아리스토텔레스 훨씬 이전부터 캐릭토님 기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부르시고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주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원래 잘 흔들리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처럼 반석과 같은 인생을 삽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야고보에게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지어주십니다. 보아너게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두 사람의 폭발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표현한 별명입니다. 별명처럼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역자가 됩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이름이 마태로 바뀝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레위를 마태로 바꾸어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인생을 캐릭토님 기법으로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이름 속에 인생 스토리가 있고, 사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이름과 전혀 반대로 인생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유다는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저주스러운 이름이 됐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대부분 부모님이 지어주셨겠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름에 인생이 있고, 이름에 축복이 있고, 이름에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꼭 이름처럼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사기 4장은 하나님의 캐릭토님 기법이 두드러진 장입니다.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말씀을 다바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습니다. 드보라와 다바르는 히브리어로 표기가 비슷합니다. 드보라가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임이 이름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에 드보라와 바락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오늘은 야엘과 그 남편 헤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솔 왕 야빈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시대에 사람들이 드보라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드보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재판을 해 사회에 공의를 실현합니다. 법이 바르게 시행되는 곳이 바로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드보라는 억압과 불법으로 답답한 사람들의 마음을 꿀처럼 달콤하게 해주었습니다. 드보라가 사람들의 삶을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드보라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지금은 불법의 시대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가정에, 삶에 말씀의 꿀이 흐르게 하십시오. 말씀으로 가나안 땅으로 만드십시오. 드보라는 여자입니다.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군대장관 바락에게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서사가 드보라에게서 바락에게로 이어지려는 순간입니다. 드보라의 스토리가 바락의 스토리로 넘어가려는 순간입니다. 드보라에게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바락에게 분배되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락이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바락은 드보라에게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가겠다고 합니다. 바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을 붙잡습니다. 바락은 믿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사람도 붙잡고 하나님도 붙잡았습니다. 중간에서 믿음의 결단을 못 내렸습니다. 사람을 더 굳게 잡았습니다. 신앙생활은 믿음과 세상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선택입니다. 한쪽에서는 사람(세상)이 계속 부르고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계속 부르십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자리와 은혜의 자리의 갈등입니다. 중간에서 고민하다가 세상 사람이 부르는 대로 따라가지 마시고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신앙은 결단입니다.
바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의 구원 스토리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로 전환됩니다. 기회가 이방인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이 11절입니다. 만약 바락이 온전히 순종했다면 11절 말씀이 여기에 삽입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겐 족속에게 영광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의 싸움에 갑자기 겐 사람이 등장합니다. 겐 족속은 미디안 족속의 한 분파로 모세의 처가가 속한 족속입니다. 겐 사람은 원래 가나안 땅 최남단에 거주하는 유목민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모세의 요청으로 이스라엘 대열에 합류했다가 갈릴리 북부에 정착한 이방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수많은 잡족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따라서 나옵니다. 출애굽기 12:37-38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수많은 민족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따라 나왔습니다. 겐 족속은 민수기 1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합류합니다. 그러니까 겐 족속은 이스라엘에 들어온 수많은 잡족 가운데 가장 끝에 합류한 족속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포도원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들을 불러옵니다. 또 9시, 12시, 오후 3시에도 나가 품꾼들을 불러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마감 직전인 5시에도 품꾼들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품삯은 똑같이 받습니다. 포도원에 5시에 들어온 품꾼처럼 겐 족속은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영광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민수기 11:4에서는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라고 했습니다. 겐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입니다. 겐 족속은 비주류입니다. 이 비주류에게 영광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겐 족속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200년 정도가 됐지만 여전히 장막 생활을 하며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장막을 쳤더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은 했지만 그들의 고유의 생활방식을 계속 고집하며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 왔으면 옛날에 갖고 있던 세상 것은 버리세요. 그런데 이들은 하솔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압제할 때 야빈과 평화 협정을 맺어 친분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7절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겐 족속은 모세의 처가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은혜를 입었지만 이스라엘과 야빈 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던 족속입니다. 헤벨은 ‘친구’, ‘전우’라는 뜻입니다. 헤벨은 모세의 처가 민족이라 이스라엘 친구 같은데 하는 것을 보면 원수인 야빈의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친구인데 누구의 친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친구입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세상의 친구 같기도 하고 예수님의 친구 같기도 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박쥐같은 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세상의 아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세상 친구라는 말은 마귀 친구라는 뜻입니다. 마귀 친구가 아니라 예수님 친구가 되십시오. 바락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분명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이스라엘과 야빈 사이에 있던 겐 족속에게 그 기회가 주어집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겐 족속은 누구의 손을 잡을까요? 하나님의 손을 잡을까요? 아니면 세상 왕 야빈의 손을 잡을까요?
바락은 드보라와 함께 만 명을 데리고 다볼산으로 올라갑니다. 시스라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기손 강에 모읍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가라고 처음 명령했을 때 시스라의 군대가 기손강으로 모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7절). 그런데 정말 기손강에 모인 것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이 원수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바락은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보고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욥기 4:15에 “그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쭈뼛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엘리바스는 악령의 역사를 느끼고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모인 시스라의 군대의 수를 10만에서 20만 정도로 추정합니다. 시스라의 군대를 십만과 이십만의 중간인 십오 만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15배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더 우위입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잘 훈련된 정예군이지만 이스라엘 군대는 급조된 군대입니다.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오합지졸입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갑옷과 칼과 창으로 무장했지만 이스라엘 군대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몽둥이나 농사지을 때 쓰는 연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시스라에게는 철병거 900대가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탱크 같은 위력을 지닌 무기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시스라의 정예군 앞에서 그냥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보라는 바락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외칩니다. 14절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엄청난 적군의 위용 앞에서 연약한 여자 드보라가 바락에게 “일어나라”라고 외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스라를 이스라엘의 손에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근거는 생각, 감정, 경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의논도 하고 고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기도로 움직여야 합니다. 만약 드보라가 바락을 포함한 참모들과 전략을 짜고 의논했다면 결코 다볼산에서 내려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스라에게는 철병거가 있습니다. 철병거는 평지에서는 강하지만 산지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산에서 내려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바락이 드보라의 말대로 만 명을 거느리고 기손 강으로 내려갑니다. 시스라의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바락의 이 용기가 정말 놀랍습니다. 이 용기가 어디서 왔을까요? 비록 그가 처음에는 사람을 의지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가는 것을 보고 믿음의 용량이 커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차도 키우고, 집도, 사업장도 키웁니다. 돈, 출세, 명예, 일 등등 세상 욕망은 키우는데 믿음의 용량은 키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용량은 작아집니다. 여러분! 믿음의 용량을 키우십시오.
바락이 산에서 내려가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시스라가 군대를 집결한 곳은 기손강입니다. 기손강은 와디입니다. 와디는 강바닥, 계곡이라는 뜻입니다. 와디는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말라서 붙은 땅이 되지만 비가 오면 갑자기 강이 되거나 진창이 되는 곳입니다. 아랍 쪽 나라들에서 와디를 볼 수 있는데 작은 개천인데 갑자기 물이 불어 다니는 차를 쓸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후가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집니다. 건기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건기라 시스라가 안심하고 병력을 기손강으로 모았습니다. 그런데 바락이 기손강으로 내려가자 갑자기 비가 온 것입니다. 5장 4절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바락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였을 때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습니다. 말씀에 따라 움직이십시오. 기손강에 물이 흘러내리자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철병거가 무용지물이 됐습니다. 4장 15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하나님이 일하시니까 시스라가 믿고 자랑하던 철병거가 아무 쓸모없는 고철덩어리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강함을 약함으로 만드시고, 약함을 강함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제 헤벨 민족이 자신들이 누구의 친구인지가 결단을 내릴 때가 왔습니다. 시스라는 혼자서 도망을 가다가 야엘의 장막을 지나가게 됐습니다. 시스라는 헤벨의 장막에 들어가 피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18절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야엘이 “내게로 들어오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야엘이 친절하게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시스라가 경계심을 풀고 야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야엘은 시스라에게 씻도록 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드보라의 말 한 마디에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의 움직이고, 야엘의 말 한 마디에 하솔의 군대장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말 한 마디에 전쟁의 승패, 민족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고 있습니다.
기손강에서 야엘의 집이 있는 게데스 근처 사아난님 상수리나무까지는 50km입니다. 걸어서 2-3일 걸리는 거리입니다. 시스라가 걸어서 2-3일 정도를 도망한 것입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힘이 다 빠져 있습니다. 진창에 빠져 몰골이 흉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시스라를 그날 그 자리에서 바로 처리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영광을 바락에게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자리에서 바락이 처리하게 하시지 않으시고 2-3일 후에 다른 곳에서 엉뚱하게도 여자가 처리하게 하셨습니다. 적장이 2-3일 동안 걸어서 혼자 헤벨의 장막까지 온 것입니다. 보통 이 정도의 직위면 여러 명의 호위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호위병도 하나 없습니다. 힘은 빠질 대로 빠져 있습니다. 이제 힘없는 여성도 이 적장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왜 야엘의 집까지 왔을까요? 이제 세상 힘과 하나님 사이에서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밥상을 차려놓으셨습니다.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밥상을 물리칩니다. 이 밥상을 안 먹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결단의 기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결단만 하만 됩니다. 그런데 결단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단하십시오. 바락이 하나님이 다 차려놓은 밥상을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놓칩니다.
야엘이 반갑게 맞아들이자 지쳐 있던 시스라는 야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야엘은 쉴 수 있도록 침실까지 내어주었습니다. 시스라는 야엘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19절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야엘은 시스라에게 물대신 우유를 줍니다. 우유에 풍부한 필수 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로토닌'과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합성을 촉진합니다. 우유의 칼슘은 뇌와 신경을 안정시키고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어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돕습니다. 배가 고파서 잠이 오지 않을 때 따뜻한 우유 한 잔은 속을 편안하게 해주고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쉽게 잠들 수 있게 해줍니다. 잠자기 전 우유를 마시면 꿀잠을 잘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자녀에게 엄마가 우유를 간식으로 주는 것은 공부 그만 하고 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며칠 쉬지 못하고, 먹지 못해 지친 시스라는 우유를 마시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21절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시스라는 실신한 사람처럼 정신 없이 잤습니다(라담). 시스라가 깊이 잠 들자 야엘은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아 처단합니다. 겐 족속의 장막을 치는 일은 여인들이 했습니다. 야엘은 말뚝을 막는 일이 익숙했을 것입니다. 관자놀이는 외부 충격에 아주 취약합니다.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맞으면 두통이나 어지러움증이 생길 수 있고, 심하게는 두개골 골절, 뇌출혈, 뇌진탕 등 치명적인 뇌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야엘은 아주 쉽게 시스라를 처리했습니다. 전쟁의 승리의 영광이 야엘에게 돌아갑니다. 전쟁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시작은 드보라가 했고, 끝은 야엘이 했습니다. 전쟁을 여자가 시작했고, 여자가 끝냈습니다. 만약 여기서 야엘이 결단을 안 했다면 어쩌면 겐 족속은 계속 중간에서 줄타기하다가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야엘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 민족을 구원한 것입니다.
야엘이 우유를 주는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엘은 산양이라는 뜻입니다. 야엘이 부대를 열고 우유를 주는 모습은 산양이 우유를 제공하는 형상입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젖은 사랑이고, 꿀은 공의, 정의입니다. 가나안 땅은 사랑과 공의가 흐르는 땅입니다. 드보라는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의 꿀이 흐르게 했고, 야엘은 사랑이라는 젖을 흐르게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젖으로 전쟁을 끝내고 이스라엘 땅에 다시 젖과 꿀이 흐르게 했습니다. 여인들에 의해서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세상이 무법천지였습니다. 도덕적 영적 타락과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를 구약의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이 암흑시대에 두 여인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든 것입니다. 암흑시대에 두 여인이 여호와의 종교의 본질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 15장은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 4장은 여인들의 장이라고 합니다.
시편85:10-12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인애와 진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십자가입니다. 의와 화평도 십자가에서 입 맞추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 신약의 가나안 땅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가나안입니다. 교회가 사사시대처럼 되면 안 됩니다. 드보라처럼 하나님의 벌꿀이 돼서 복음의 꿀, 말씀의 꿀을 나누어주십시오. 말벌이 되지 마십시오 야엘처럼 하나님의 산양이 돼서 사랑의 우유를 나누어주십시오. 늑대가 되지 마십시오. 그래서 거짓과 불법, 악행으로 도배된 세상에서 교회를 이 땅에 존재하는 가나안 땅으로 만들어주십시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말씀의 꿀과 사랑의 우유를 나누어주는 곳입니다.
조선일보가 2005년에 광복 60주년을 맞아 5월부터 10월까지 <아! 어머니>전(展)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었습니다. 부제가 “당신이 만든 대한민국입니다”입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어머니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전시회입니다. 아! 어머니 전은 대한민국의 격동의 시대에 한없는 사랑과 희생으로 나라의 버팀목이 됐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전시회에 이런 편지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집에 사발시계 하나 없던 시절, 자식 5형제가 20리 넘는 학교에 다녔으니 어머니는 새벽밥 전문가이셨지요. 비가 오나 날이 잔뜩 흐릴 때처럼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운 날이면 어머니는 한밤중에 수십 번도 더 일어나셨지요. 그러니 어느 하룬들 편히 주무셨을까요….” 국가, 사회,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위태할 때 그 본질을 잡아주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둥을 세워주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는데 바락이 야엘의 집에 왔습니다. 22절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추격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다프입니다. 도망가는 자를 생포하거나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쫓아간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미 전쟁은 끝났고 시스라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락은 시체를 사력을 다해 쫓고 있습니다.
1944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일본군 중위 히로 오노다는 필리핀의 작은 루방섬에 파견됐습니다. 루방섬에 도착한 지 몇 주 만에 미군을 피해 섬 안쪽 정글로 패퇴했습니다. 하지만 오노다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섬을 떠나지 않고 거의 30년 동안 이 작은 섬에 숨어 살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1959년 오노다가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나 사실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일본제국 군대가 돌아올 때까지 이 섬을 지키라는 비밀 임무에 몰두했던 오노다는 2차 대전이 절대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1974년 일본으로 귀국한 오노다는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전쟁에서 귀국한 마지막 일본군인 오노다의 회고록은 곧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이 스토리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 2021년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독일에서는 소설로 나오고, 호주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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