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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겁쟁이에서 큰 용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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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 6:11~16
주일오전예배 | 2026-06-0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제임스 애그레이의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라는 어린이 동화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숲에서 새끼 독수리 한 마리를 잡아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남자는 독수리를 닭과 오리가 들어 있는 우리에 넣고 키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새끼 독수리는 어른 독수리가 됐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동물학자가 닭장 속의 독수리를 발견하고 말했습니다. “어 저 새는 독수리잖아!”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맞아. 하지만 난 독수리를 닭이 되도록 가르쳤다네.” “아니야. 그래도 독수리는 독수리지. 여전히 독수리의 마음을 갖고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어.” 동물학자가 말했습니다. “천만에 이제는 닭이 되었으니 절대 날지 않을 걸 새.” “그래? 그러면 한번 내기할까?” 남자와 동물학자는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독수리는 날지 않았습니다. 동물학자가 지붕 위에 올라가서 독수리를 날게 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닭들이 떼 지어 있는 것을 보고, 닭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남자는 말했습니다. “거봐, 저놈은 닭이야.” “아니야, 독수리는 독수리야. 여전히 독수리의 마음을 갖고 있을 테니까 한 번 더 시험해 보세.” 동물학자는 말했습니다. 동물학자는 독수리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너는 독수리다. 네가 있을 곳은 저 높은 하늘이지, 이 낮은 땅이 아니야.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 보렴!” 그러나 독수리는 날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동물학자가 포기하지 않고 독수리에게 해를 똑바로 쳐다보게 했습니다. 문득 독수리는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독수리답게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평범하고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 이야기를 쓴 제임스 애그레이는 아프리카 가나 사람입니다. 애그레이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은 자신 같은 흑인들을 위해 이 동화를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리카인들이여! 우리는 똑같이 동등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 흑인들을 닭이라고 가르쳤고, 우리는 정말로 닭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수리입니다. 여러분!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십시오.”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애굽기 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독수리처럼 강한 하나님의 날개에 업혀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독수리 날개보다 더 큰 하나님의 날개에 업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날개에 업혀 있습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은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미디안의 학대로 고통을 당하던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른 한 쪽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전설적인 사사 기드온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아들을 번제로 드리러 올라갔을 때 산꼭대기에는 양 한 마리가 수풀에 걸려있었습니다. 이 양은 어디서 왔을까요? 저는 아브라함이 번제 드리기 위해 산 이쪽에서 올라갈 때 하나님이 반대쪽에서 양을 끌고 동시에 올라가셨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될 때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예배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일하십니다.

 

기드온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왜 상수리나무일까요?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바위를 움푹하게 파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바위도 움푹 판 후에, 그 사이에 포도즙이 흘러갈 수 있는 길을 내서 으깨진 포도에서 나온 즙이 다른 한 곳의 구멍으로 흘러가 고이도록 했습니다. 기드온이 그 움푹하게 파인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밀알을 손이나 돌로 비벼서 깠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아주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상수리나무일까요? 기드온 시대 상수리나무는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중학교 때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보면 제가 사는 마을 직전 마을 한 가운데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그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을회관에 모이지만 그때는 나무 밑에 모였습니다. 상수리나무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불당동의 제일 고층 건물을 지을 때 불당동의 랜드 마크가 될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상수리나무는 랜드 마크 같은 곳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지금도 큰 나무 아래에서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 상수리나무 아래입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상수리 수풀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곳이 상수리나무 아래입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직전에 여호와의 율법은 돌에 기록하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웠습니다. 상수리나무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구심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상수리나무 아래로 왔다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노애락이 있는 삶 한 가운데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연약함의 자리, 치욕과 부끄러움의 자리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치욕의 자리로 오실까요? 치욕을 씻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과거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만나던 장소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우상 숭배하는 한 가운데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한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한 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내 연약함의 자리, 치욕, 부끄러움의 자리로 오셔서 치욕을 씻어주시고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십니다.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것이 내 인생, 내 가정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예배할 때, 얽힌 인생이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향해 “큰 용사여!”라고 했습니다. 12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큰 용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기뽀르 헤하일입니다. 기뽀르 헤하일은 큰 용사라는 뜻으로 큰 전쟁에서 승리한 전적을 가지고 있는 ‘군대의 영웅’ 또는 ‘탁월한 전사’를 의미합니다. 룻기에서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했습니다. 유력한 자라는 말이 큰 용사와 똑같은 말입니다. 룻기에서 이 말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고, 사회적 능력이 탁월해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재산도 많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 전쟁의 영웅, 유력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칭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 숨어서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소심한 모습니다. 대담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놀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 기드온이 큰 용사일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용사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힘이 세기 때문에 큰 용사가 아닙니다. 무예가 출중하거나 능력이 있어서 큰 용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용사입니다. 기드온의 현재 상태는 보잘 것 없습니다. 소심합니다. 겁쟁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큰 용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됩니다. 초점이 기드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초점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누구나 큰 용사가 됩니다. 지금은 내가 재능이 없고, 머리가 좀 나쁘고, 못났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유력한 자가 됩니다. 저희 교회에서 사역하시던 이 목사님의 장인이 성결교 목사님이세요. 신학교를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목사님이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셨대요. 그래서 제가 머리가 나빠서 목사를 못할 것 같다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환상을 하나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신학교를 합격했고, 성결교단의 유명한 부흥사가 되셨습니다. 성결교단에서 유력한 자가 되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 고등학교 후배 윤석재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려고 검색을 했습니다. 텍사스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클릭을 했는데 강대상 뒤 십자가 옆에 영어로 <Not I, But Christ.>라고 써져 있었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누가 큰 용사입니까?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약함을 알고 그분의 강함을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옛날 이름을 아십니까?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시몬입니다. 안드레가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장차 너를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바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요1:42).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이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미래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들쑥날쑥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입니다. 돌멩이 같고, 갈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의 미래의 모습을 보시고 베드로,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말을 잘 못합니다.”(렘1:6)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 너는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리라”(렘1:18) 예레미야의 지금의 모습은 아이입니다. 말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후의 모습은 쇠기둥 놋성벽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용사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의 현실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하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전쟁에서 영웅처럼 우뚝 서게 하실 미래의 모습을 일컫는 칭호입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Not I, But Christ.> 이것을 알고 헌신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라고 했고,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15:9)라고 했으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했습니다(고전15:8). 만삭되지 못했다는 말은 칠삭둥이, 팔삭둥이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연약한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거나 자격지심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이 연약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미래의 강한 나를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Not I, But grace. Not I, But Christ.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 큰 용사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쿨리가 주장한 거울 자아 이론(Looking-glass self)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타인의 시선과 반응을 거울삼아 자아상과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이론입니다. 사람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상을 한 뒤에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 담고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며 십니다. 용모, 의견, 행동에 대한 타인의 태도를 보면서, 타인의 생각을 상상해, 나를 판단합니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를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국 믿어버립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내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게 그대로 내 정체성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 내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울 자아 이론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사람은 관심종자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관종이라는 말입니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에 왕비가 나옵니다. 왕비는 거울을 보며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습니다. 왕비는 관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왕비처럼 관종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니?” 이런 물음을 하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관종입니다. 사람들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가 나는 아닙니다.

 

여러분! 관종이 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나를 상상하며 불안해하거나 우울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비친 나를 생각하며 기뻐하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이 사람이나 이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맹인이 사람들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죄인으로 비쳤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존재로 비쳤습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드신 바”라는 말이 작품, 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 하나님의 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를 상상하며 살지 마시고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를 믿으며 기쁘게 사십시오. 사람들이 하는 말 때문에 고민하지 마시고,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기뻐하십시오.

 

 

사람들의 눈에 비친 기드온은 겁쟁이였지만 여호와의 사자의 눈에 비친 기드온은 큰 용사였습니다. 기드온을 부르시고,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똑같이 부르시고 우리에게 같은 말씀하십니다. “요한아! 과거의 아픔에 묶이지 마라. 성도여! 현실의 한계 상황에 얽매여 우울해하지 마라. 현재의 일 때문에 답답해하지 마라. 내가 함께 하는 미래를 봐라. 너는 큰 용사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미래를 보십시오. 내 가정, 내 직장, 내 자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직장을 축복하시고, 내 자녀의 미래를 축복하십시오. 현재 내 눈에 비친 내 자녀의 모습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를 어떻게 보는지 상상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 용사, 유력한 사람이 됩니다. 현재의 모습 때문에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기드온이 소심하고, 연약했지만 그가 가졌던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13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주셨나이다 하니” 이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아니,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제 꼴을 보십시오. 저는 지금 미디안에게 먹을 것을 빼앗길까봐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놀리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출애굽의 기적을 믿었고 홍해의 기적을 믿었습니다. 성경의 기적을 믿었습니다. 기드온은 왜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은 나타나지 않는지 갈등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때는 출애굽의 기적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그 기적이 이 민족에 없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기드온과 같은 고민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이럴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불행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고민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홍해를 가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신데 왜 나에게 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의 문제도 아니고, 어떤 재능이 있는지의 문제도 아닙니다. 내가 성경을 믿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전쟁은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역사하시느냐 역사하시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기도온의 고민은 우리 민족에게 왜 지금은 출애굽의 기적이 없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원망하는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네가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14절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이 너의 힘”은 기드온이 가진 인간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보내신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기드온을 보내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소명을 깨닫는 데서 나오는 영적 힘입니다. 하나님 탓하고, 남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원망하며 살지 말고, 네가 가서 네가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주길 바라지 말고 네가 하라는 것입니다. 허공을 바라보며 누가 나의 이 상황을 바꿔주지 않나 공상만 하지 말고 네가 하라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더 이상 쫄지도 말고, 숨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깨를 펴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가면 내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기드온이 “나는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15절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입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민족을 구하겠습니까?”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11지파는 지파별로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는 반으로 쪼개져서 반은 요단 동편에 살았고, 반은 요단 서편에 살았습니다. 쪼개진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분열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화합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지파에 비해서 영향력이 약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쪼개져서 아프고 작은 지파 중에서 작은 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쪼개지고, 상처입고, 작은 자를 부르셨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캐나다의 시인이며 가수인 Leonard Cohen의 ‘Anthem’이란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다. 빛은 바로 그 틈으로 들어온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바울에게 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그 병을 빌미 삼아 바울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사도직을 비판했습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의 병을 빌미삼아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병으로 고생하는데 저게 무슨 사도야? 다른 사도들 봐라. 병을 고쳐주지 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는 않지. 저런 사도는 없어.” 얼마나 괴로웠는지 바울은 이 병 때문에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를 내 능력이 머물게 하는 도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몸에 있는 금이 하나님의 빛이 들어오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내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살다가 생긴 인생의 틈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고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 삶에 생긴 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틈으로 하나님의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틈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틈에 은혜가 다 차는 날에 그 틈은 여러분의 인생의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틈이 없으면 하나님의 빛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틈을 은혜로 꿰매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깨진 틈을 꿰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60: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우리도 “우리 인생의 깨진 틈을 꿰매주소서!”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깨진 틈을 꿰매주실 수 있으십니다. 상처 없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처를 견딘 인생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네가 미디안을 한 사람을 치듯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16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미디안 군대의 숫자는 135,000명입니다. 칼을 든 보병이 12만 명이고 창병 1만 5천 명입니다. 당시 최강의 대군입니다. 기드온 용사는 300명입니다. 300명이 135,000명을 한 사람을 치듯 하겠다는 것입니다. 300명이 1명을 치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완벽한 승리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아주 쉬운 승리를 주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면 불가능하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쉽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능한 자는 능력자가 되고, 미련한 자는 지혜자가 되고, 약한 자는 큰 용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겁쟁이가 큰 용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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