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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구원받았느냐는 말과 예수님을 믿느냐는 말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머뭇거리면서 잘 대답을 못하는데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아주 잘 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있어도 확신이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존 라일 목사님은 믿음과 확신을 뿌리와 꽃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믿음은 뿌리와 같고, 확신은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뿌리 없는 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 없는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뿌리는 있는데 꽃이 아직 없을 수는 있습니다. 믿음이란 뿌리는 있지만 아직 확신이란 꽃이 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있지만 확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그 도당이라고 하자 베드로가 아니라고 합니다. 믿는 것을 숨긴 것입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막 증거합니다. 이것은 확신입니다. 믿음은 뿌리이고, 확신은 꽃입니다. 믿음은 시작이고, 확신은 절정입니다. 제가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있어도 구원의 확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확신이 없어도 믿으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아직 확신이 없으신 분들에게 확신이라는 꽃이 활짝 피기를 바랍니다.
전에 구원파가 믿는 사람들을 붙잡고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물어서 없다고 하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확신이 없어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확인하려면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지 확인해보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씩 내가 구원받았는지 믿음을 확인해보십시오. 요한일서 5:13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확신을 주려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이 편지를 쓴 이유는 믿는 자들에게 혼란한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확신의 꽃이 활짝 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강을 누리시고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본문은 의심 많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종종 제2위 되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경학자들을 이것을 구약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십니다. 기드온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사람으로 내려오신 하나님과 천사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도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드온에게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셨고, 또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정말 하나님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내 부르심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17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표징은 표적, 기적, 증거라는 뜻입니다. 표징을 보여 달라는 말은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그냥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있는 기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분명한 확신을 갖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기드온은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직장 선택, 앞길 인도, 인생의 진로, 중요한 수술, 삶의 방향을 결정할 때 어떤 것이 맞는지 불안하고 염려가 된다면 하나님께 묻고 또 물으십시오. 기드온에게 표징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표징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찬송가 185장 3절 “한없는 사랑과 그 크신 은혜를 늘 의심하면서 안 믿는 자에게” 인간은 연약해서 늘 불안하고 의심합니다. 자꾸 의심이 생깁니다. 그리는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표징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자 도마는 내가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도마에게 손에 못 자국을 만져보고 허리에 손을 넣어보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못 믿는 자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마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기적적인 증거를 요구하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그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18절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기드온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겠다며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곳에서 떠나지 마시기를 구하자, 하나님께서 네가 올 때까지 여기에서 머무르고 있겠다고 하십니다. ‘머무르다’는 말을 개역 성경은 ‘기다리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에는 ‘앉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네가 다시 올 때까지 내가 여기 앉아서 기다리겠다는 뜻입니다. 앉아서 기다린다는 말은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앉아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실까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자녀가 삐뚤어집니다. 남들은 포기해도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자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왜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군대 간 애인을 기다립니다. 왜 기다릴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창기와 함께 다 먹어버렸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돼지치기를 하며 겨우 겨우 살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상거가 멀어 아들의 모습이 가물가물한데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날부터 아들이 돌아오는 날까지 매일 마을 입구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누더기 옷을 입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아버지는 알아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겼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기다림은 감격이고, 사랑이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나를 기다리십니다.
누가복음 13장에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3년 동안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만 버리니 무화가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지기가 대답합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후에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십시오.” 포도원 지기가 “금년에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해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했고 포도원 지기는 해마다 금년만 참아달라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무화과는 심는 해부터 바로 열매를 맺습니다. 주인은 해마다 와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고 다른 것을 심든지 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 지기는 해마다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내년에도 “금년에도 그대도 두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기다림은 열매를 맺는다는 희망입니다.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포도원 지기는 무화과나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시고,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이시고, 무화과는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기다려달라고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 말씀처럼 나를 계속 기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희망을 걸고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그 희망을 믿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기다리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림은 희망이고, 사랑이고, 은혜고, 축복입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다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 기다리시고, 세상으로 나갔다가 다시 이곳에 예배하러 오기를 기다리시고, 여러분이 천국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다리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을 바람맞히지 마십시오. 이사야 30장 1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기드온의 말에 앉아서 기다리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밀가루로 무교병을 굽고, 염소 새끼를 잡는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을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상수리나무로 돌아온 기드온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립니다. 19절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저희 집에서 20kg 쌀로 다섯 식구가 한 달을 조금 넘게 먹습니다. 점심은 밖에서 먹을 때도 있으니까 아침과 저녁만 최소한으로 계산해 하루 10명분에 30일을 곱하면 20kg은 약 300명분입니다. 더 적게 잡아서 200명분이라고 하겠습니다. 1에바는 22.7리터입니다. 밀가루 20kg 1부대로 빵을 만들면 적어도 200명이 한 끼 식사로 먹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AI에게 밀가루 22.7리터로 무교병을 만들면 몇 명이 먹을 수 있는지 물었더니 60명 ~ 120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맞나 싶어서 다시 물었더니 이번에는 120명 ~ 200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금방 답이 달라졌습니다. 이상해서 몇 번 더 물었는데 물을 때마다 AI의 대답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아직 AI가 믿을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밀가루 22.7리터 외에 새끼 염소와 국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 분량이면 적어도 200명 이상이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많은 분량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빼앗길까봐 밀을 포도주 틀에 숨어서 몰래 타작했습니다. 미디안에게 많은 것을 약탈당해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입니다. 생명과도 같은 양식입니다. 이 정도 양식이면 가족이 한 달은 족히 버틸 수 있는 분량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혼자 앉아 계십니다. 2-3인분만 드려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전쟁의 때에 하나님께 예물을 풍성하게 드린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안 주려고 꼭 쥐고 감추어두었던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감사, 헌신의 결단입니다. 내 생명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이 좀 이상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는 성경 레위기에 규정된 대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에는 제사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이 가져온 염소나 무교병은 레위기에 있는 제물이지만 국은 아닙니다. 성경에 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사람은 기드온 밖에 없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어떤 제물을 드려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기드온이 가져온 제물들을 바알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바알에게 제사하는 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아주 가증한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바알 아세라 숭배가 얼마나 만연했는지 우상의 제물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가져온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어떤 제물을 드려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이것은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예배가 무너지고, 성경 말씀이 무너졌음을 보여줍니다. 기드온 시대는 신앙이 무너진 시대였습니다.
지난 주간에 전에 같이 사역하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교회에 부임한지 1년이 됐습니다. 부임했는데 예배가 주일 낮 예배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 오후 예배, 새벽예배, 수요일 예배, 금요일 기도회를 하겠다고 했더니 장로님과 성도님들이 예배하지 말라는 거예요. 해도 우리는 못나가고 하면 부담되니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도 금요 기도회는 사람들이 나오든지 나오지 않든지 하겠다고 하고 금요 기도회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성도나 목회자를 비판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시대가 이렇게 됐습니다. 전에는 교회에서 예배가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예배가 불편한 것이 됐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예배의 많은 부분이 허물어졌습니다. 코로나가 끝난 지 4년입니다. 그런데 아직 교회 나가지 않고 집에서 유튜브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거 예배 아닙니다. 여러분! 예배를 대충 드리지 마시고 정말 잘 드립시다. 바른 예배를 회복합시다.
유튜브 잘잘법의 김학철 교수의 이야기 조금 하겠습니다. 김학철 씨는 장로교 통합측 목사이고, 연세대학교 교수입니다. <잘잘법>은 구독자가 어제 날짜로 738,000명입니다. TV에 나오는 이호선 교수의 남편입니다. 저와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어서 조금 언급을 하겠습니다. 잘잘법에서 김학철 교수는 신약 성경에 지옥이라는 말이 23번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성경에 단 한 번만 나와도 중요합니다. 1획도 중요합니다. 23회는 성경에 정말 많이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2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내용이 많지 않습니다. 또 바울 서신에서는 지옥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옥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김 교수는 지옥을 성경이 아니라 단테의 신곡으로 설명했습니다. 지옥은 단테의 신곡의 설명처럼 사람이 그림자처럼 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거스틴의 말로 지옥을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했습니다. 김 교수는 어거스틴의 사고를 연장해서 생각한다면 지옥은 천국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의미입니다. 지옥은 천국의 결핍이 아니라 지옥 자체입니다. 천국의 결핍이 지옥이 아닙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 아닙니다. 악은 설명 불가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이 맞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의 지혜로 푸는 책이 아닙니다. 김 교수는 요한복음 3:16 말씀을 인용해 하나님을 모시는 삶이 천국이고, 하나님이 없는 삶이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입니다. 죄송하지만 지옥은 진짜 있고, 천국도 진짜 있습니다. 지옥은 천국의 결핍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김 교수는 로마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거절하는 삶을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지옥 같은 삶이지 진짜 지옥은 아닙니다. 지옥은 따로 존재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은 성경의 묘사이지 진짜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지옥은 실제입니다. 성경은 철학이나 문학책처럼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는 성경이 나를 읽고 나를 해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분당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이 어떤 기독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말보다, “예수 믿고 착해지세요.”라는 말을 좀 많이 하고 싶어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좀 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는 많은 정치인들과 유력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크리스천이지만, 그들에게서 크리스천의 성품이 드러나지 않아요.> 목사님이 하신 말씀 전체를 보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좋은 말씀이고, 김 목사님도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하지만 좀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김 목사님의 말씀에 주제넘지만 조금만 덧붙이겠습니다. 김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 믿고 착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공자나 맹자와 같은 도덕 교사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윤리 선생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 믿고 착해지세요.”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착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니 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삶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기드온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예배도 무너지고, 성경도 무너졌습니다. 신앙이 무너졌습니다. 기드온은 정성을 다해서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정성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적으로 예배하고, 성경적으로 살아야 하고, 성경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부분에서 말씀이 무너지고,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 예배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오래 전에 무너졌는데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제발 예배를 잘 드립시다. 내 식대로 믿지 마시고, 성경대로 믿으십시오. 내가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지 마시고, 성경이 내 생각, 내 삶을 해석하게 하십시오. 말씀을 따라가야지 가야지 말씀이 나를 따라오게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야지 예수님을 끌고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기드온의 온전하지 않는 제물에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염소와 무교병을 반석 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20절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하나님이 지팡이를 고기와 무교병에 대자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고기와 무교병을 태워버렸습니다. 21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기드온이 가지고 온 제물은 하나님께는 옳지 않은 제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옳지 않은 제물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 제물을 그대로 수용하셨습니다. 제물이 탔다는 말은 하나님이 열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아주 기쁘게 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불이 제물을 태운 사건이 다섯 번 있습니다. 모세의 첫 번째 성막 제사,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의 제사, 솔로몬의 성전 봉헌 제사, 엘리야의 갈멜산 상에서 제사, 그리고 기드온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제사를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기드온의 잘못된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연약하고 부족함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안에 불순하고 이교적인 것들을 끌어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온전해서 잘해서 내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흠투성이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내 허물을 씻어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를 제물에 대자 불이 반석에서 나와서 제물을 태우는 모습입니다. 지팡이와 반석과 불은 기드온 사건의 전체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또 오늘 우리에게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불이 반석에서 나왔다는 것은 능력이 지팡이가 아니라 반석에 있다는 뜻입니다. 지팡이는 기드온을 상징하고, 불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고,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 기적은 능력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Not I, but Christ. 지팡이에 능력이 있지 않고 반석에 능력이 있습니다. 지팡이는 주인에게 들려있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주님께 붙잡혀 있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기도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능력은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능력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합니다. 왜 예배할까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잡혀있다는 증표입니다. 기도를 놓지 마십시오. 기도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Not I, but Christ. 이게 기도입니다.
제물이 타는 것을 본 기드온은 그제야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죽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기드온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2절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제물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영적 눈이 떠져 기드온은 하나님이심을 알아봅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제물이 타는 순간 불안이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불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에 확신의 꽃이 핍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걸로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에 아름답게 꽃이 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불을 경험해야 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으십시오. 불이 임하는 순간 기드온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큰 영광 때문에 죄인은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있어야 영적으로 눈이 떠집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지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눈이 떠지지 않습니다. 믿는데 계속 흔들리고 확신이 없습니다. 뿌리가 생겼다면 꽃이 피어야 합니다.
기드온은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24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드온은 거기에서 야훼께 제단을 쌓아 바치고는 그 제단을 "안심시켜 주시는 야훼"라 이름지어 불렀다. 그 제단은 이날까지도 아비에젤의 성 오브라에 서 있다.” 공동번역 성경은 “여호와 샬롬”을 “안심시켜 주시는 야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안심시켜주십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제단 이름이 “여호와 샬롬” “안심시켜주시는 야훼”입니다. 예배가 샬롬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미디안이 언제 올지 몰라 불안해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했습니다. 산에 구멍을 파고 살았습니다.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고 나니 샬롬이 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니 평안해졌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미디안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평안으로 바뀌었습니다. 샬롬은 제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성도의 자리는 하나님 앞입니다. 이게 샬롬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샬롬입니다.
왜 불안할까요? 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예배에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가 무너지고, 말씀이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무너진 마음의 제단을 회복하십시오. 불안, 염려, 근심, 걱정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예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샬롬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안심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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