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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에 가면 매그너스 재활 요양병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 병원에서 94세, 별세하기 직전까지 환자들을 돌본 한원주 권사님이 있습니다. 2020년 9월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우리나라 현역 최고령 의사였습니다. 한 권사님은 가족들도 힘겨워하는 치매 노인들을 위해 일하면서 월급 대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주말이면 외국인 무료 진료소에서 자원봉사하고, 주기적으로 해외 의료봉사도 다녔습니다. 한 권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사랑만 가지고도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위로만으로도 병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대의(大醫, 위대한 의사)는 역시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말하자면 토탈 힐링(total healing)을 하는 그 상태가 대의의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수입이 적을지 몰라도 역시 우리 의사가 가야 할 길은 그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권사님은 “사랑만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육체적 치료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치유에 집중하셨습니다. 사랑에는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권사님이 별세하기(2020.9.20.) 전 가족과 병원 직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세 마디였습니다.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누군가가 미워서 눈을 부릅뜨고 한이 맺혀 이를 갈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다가 “사랑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너무 멋지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한 권사님처럼 늙고, 한 권사님처럼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사랑은 천국에서도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진짜 참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사랑의 원천이 있는 곳입니다. 불순함이 없는 아주 순수한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어떤 미움이나 시기, 이간질이 조금도 없는 곳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의 미움과 오해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거기는 틀림없이 지옥일 것입니다. 한 권사님은 그 진짜 사랑을 가지고 사셨기 때문에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신 것이고, 몸은 죽었지만 권사님의 사랑의 삶이 천국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내며 살지 마시고 이해하며 사랑하며 삽시다. 나이 먹으면 큰 사람이 돼야 합니다.
8절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이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떨어뜨리려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나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이 무효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굳게 매달려 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떨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수많은 세력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으려고 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견고하게 붙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십자가에 붙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봄입니다. 그래서 꽃이 피고 나뭇잎은 아름다운 녹색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꽃은 지고, 잎은 시들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다는 말은 생명이 다 한다, 생명이 끝난다,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꽃처럼 지거나 나뭇잎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에 떨어집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실패의 충격으로 넘어지고 무너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어떤 도전에도 실패하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곳은 아마도 배우들이 서는 무대일 것입니다. 수많은 스포트라이트가 한 사람을 비춥니다. 그 빛을 받으며 배우는 활짝 웃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인기는 떨어지고, 팬은 사라지고, 박수가 없어지며, 커튼은 닫힙니다. 인기는 떨어집니다. 배우는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람'은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입니다. 전쟁이라는 바람으로 낭만적이고 여유로웠던 미국의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이 사라졌습니다. 바람이 쓸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바람이 불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유선 인터넷만 있고 무선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선이 있는 곳에서만 인터넷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이 고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선 인터넷이 나왔습니다. 어디서든지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움직이면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무선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아주 인상적인 광고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인터넷이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이 광고에서 차태현과 김민희가 연인 사이었는데 김민희가 다른 남자를 만납니다. 차태현이 김민희에게 문자를 보내 잘못했다며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지만 김민희가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가면서 혼자 말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합니다. CF 2탄, 이번에는 차태현이 다른 여자를 만납니다. 김민희가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차태현이 조는 사이에 다른 여자가 메시지를 삭제하면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사랑이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 가치였는데 지금은 사랑이 쉽게 움직이는 가치가 됐습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변하고 없어집니다. 요즘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 됐습니다. 사랑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운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카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헬라어로 사랑이란 단어가 네 개입니다. 육체적인 사랑 에로스,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스토르게, 친구 간에 우정 필리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도, 스토르게도, 필리아도 떨어집니다. 하지만 아가페는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어느 날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혈육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사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기도를 했는데 꿈에 목사님이 천국을 갔습니다. 천국에서 아내를 보고 너무 반가워하는데 아내가 여보라고 하지 않고 형제님이라고 해서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천국은 인간적인 가족관계가 다 끝나는 곳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천국은 참 슬픈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인간적인 사랑이 끝나고 더 높고 아름다운 차원의 사랑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천사들과 같은 상태가 돼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룰 것입니다. 거기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고훈 목사님이 담임하시던 안산제일교회 교회가 막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고 목사님은 2024년 12월에 별세하셨습니다. 어느 주일 날 교인 중 한 분이 갈비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저녁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이 성도님과 함께 식당으로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예배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데 고훈 목사님의 어머님이 교회 앞 길 가 어둑어둑한 곳에 좌판을 벌려놓고 양말을 팔고 계셨습니다. 당시 어머님은 82세이셨습니다. 아버님은 고 목사님이 열두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님은 혼자 사시면서 행상도 하시고 길에서 양말도 파시면서 일평생 고 목사님의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 이제는 어머님이 행상을 안 해도 되는데 어째서인지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 바로 앞에서 교인들을 상대로 양말을 파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교회에서 목회하는 교회 앞에서 어머니가 행상을 하다니! 너무 기가 막혔습니다. 목사님은 갈비 먹을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저 행상하는 할머니가 담임목사의 어머니다’라는 소문이 교회에 퍼지면 목회에도 적잖은 타격이 될 것 같아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성도님을 ‘갑자기 내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집으로 보냈습니다. 교우들이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간 즈음에 당황스런 마음으로 양말 파는 어머니에게 다가가서 손을 덥석 잡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도대체 여기서 왜 이러세요?”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낯선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도 깜짝 놀라며 “아니, 나는 당신 같은 아들 둔 적이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고 목사님의 어머니와 체구와 외모가 닮은 낯선 할머니가 교회 앞에서 양말을 팔고 계셨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순간, 그 분이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께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제게 열두 살 때 혼자되신 어머니가 계신데 우리 어머니도 이렇게 길에서 행상을 하시며 물건을 팔고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두워서 저희 어머니 인줄 알았습니다.” 죄송하기도 하고, 또 도움을 드린다는 마음으로 할머니가 파시는 양말을 몽땅 다 사드렸습니다. 그 행상 할머니가 “다 사실 필요 없다.”고 만류했지만 목사님은 “아뇨,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럽니다.”라고 하면서 양말을 몽땅 사드렸다고 합니다. 집으로 양말을 한아름 가져오자 사모님이 깜짝 놀라면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냥 아무 소리 말고 양말이나 신어요. 그 행상하시던 분이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었어요!” 그때 성령께서 이렇게 고훈 목사님께 말씀하셨답니다. “여보게, 그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가 네 어머니가 아닌 게 그렇게 좋으냐? 그 할머니도 네 어머니니라!” 이 말씀을 목사님이 내적 감동으로 그 순간에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성경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요한복음 19:27에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고훈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고 앞으로 저도 교회 안에서 저 보다 나이 많은 분들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생각하고 검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디모데전서 5:1-2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서 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늙은 남자에게는 아버지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남자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젊은 여자에게는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조 집사님!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멀이 있는 아들에게 전화하지 마시고 저에게 전화하세요. 여러분! 시간이 가면 떨어지고 실패하고 없어지는 사랑으로 사랑하지 마시고, 시간이 가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뜨겁게’를 개역 성경은 ‘열심히’라고 번역했고, NIV 성경은 ‘깊게’(deeply)라고 번역했습니다. 열심히 뜨겁게 깊게 사랑합시다.
바울은 사랑을 영적 은사들과 비교했습니다. 8절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지만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각종 신비한 은사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은사를 경험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셔서 영적 은사를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성령의 9가지은사가 나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영적 은사를 자랑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를 자랑한 것 같습니다. 자랑하면서 서로 파당을 나누어 싸웠습니다. 너희들이 자랑하는 그 은사들은 귀하지만 때가 되면 그친다는 것입니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 때문에 싸우지 말고 사라지지 않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섬기며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가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능력입니다. 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마음)과 계획을 깨달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영적 능력입니다. 예언은 점쟁이처럼 미래를 맞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람들을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해 주신 말씀의 은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교회와 성도의 삶에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성경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만 규정합니다. 하지만 미국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이런 예언 활동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2024년에 큰 논란이 된 사건이 있습니다. 브랜든 빅스 목사님이 2024년 3월 14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과 스티브 치오콜란티(Steve Cioccolanti) 목사의 유튜브 채널에서 트럼프가 피격을 당할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건 발생 4개월 전에 트럼프가 피격을 당해 총알이 트럼프의 오른쪽 귀를 스쳐지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총격 이후 트럼프는 무릎을 꿇고 주님을 경배하며, 이 사건을 통해 신앙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2024년 7월 13일 펜실베이니아주 유세 현장에서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브랜드 빅스 목사님이 예언한 대로 트럼프는 귀 윗부분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브랜드 빅스 목사님은 환상을 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예언으로 당시 미국 내외에서 큰 파장이 있었습니다. 추측이 아니라 아주 정확한 예언이었습니다. 저는 브랜튼 빅스 목사님의 예언을 부정하거나 좋다고 장려하기 위해서 이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예언은 부분적입니다. 9-10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분’이라는 말이 ‘조각’이라는 뜻입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많이 어려운 책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대표적인 이론 중에 하나가 불확실성입니다. 전자 같은 양자 입자를 관찰할 때 그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위치를 알면 그 전자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모호해지고, 전자의 속도를 알면, 그 위치는 더 불확실해진다고 합니다. 이게 불확실성의 원리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자연을 완벽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통해 과학이 단순한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차원이 다른 과학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이 책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플라톤의 자연철학에서 보면 전체는 곧 세상의 모든 것 우주이며 절대적인 것이고 부분은 이 전체를 받치고 있으면서 그 자체로서는 전체가 될 수 없는 요소를 가르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말 작은 전자가의 크기와 속도를 동시에 알 수 없는 인간이 크신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연 세계를 아주 부분적으로만 아는데 인식이 불가능한 영적 세계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은 정말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 조그만 조각 하나를 알면서 전체를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교만하지 맙시다. 잠언서의 핵심 주제 중에 하나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조그만 조각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예언들이 존재합니다. 그 사람들의 예언은 그냥 조각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예언도 없어지고, 설교도 없어질 것입니다. 기도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방언이 그치고”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인간이 배우지 않은 신령한 언어(알 수 없는 언어 또는 외국어)로 하나님께 영적인 비밀을 고백하는 초자연적인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4:4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기도 수단이었습니다.
제는 고등학교 때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입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않는 말이 갑자기 나왔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를 다니는 교회 선배가 제 방언을 히브리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영어 공부를 하는데 제 입에 나온 말들이 영어 사전에 있었습니다. 영어 사전을 보고 방언의 뜻을 알았습니다. 방언으로 한 번도 공부해본 적이 없는 영어단어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영어 방언을 아주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나라의 언어가 방언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한번은 방언 통역이 됐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들이 통역이 됐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지금도 방언을 하기는 하는데 그때 언어들이 아니라 다른 언어들입니다. 통역이 그쳤습니다. 제가 방언으로 기도를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모르면서 말하고, 부분적인 것만을 말할 뿐입니다. 방언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방언의 은사가 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방언의 은사가 없어졌다는 주장입니다. 왜 이런 논쟁이 있을까요? 아니 왜 세상에는 수많은 논쟁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부분만 알기 때문입니다. 다 알면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기 때문에 논쟁하는 것입니다. 이 신비적인 언어의 은사가 끝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적인 언어의 은사가 끝나도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이 아니라 은사로 얻는 지식입니다. 고린도전서 12:8에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가 있습니다. 지식의 은사를 받으면 사람들이나 상황에 대해 감추어진 일들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순간적으로 알려주시는 은사입니다. 이 지식의 은사를 받게 되면 성령께서 다른 사람의 숨겨진 문제, 상처, 상황을 알려주시어 그 사람을 치유와 회복의 자리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상황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보기 때문에 지식의 은사를 투시의 은사라고 합니다. 아주 신비한 일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식이 폐하여진다는 말은 지식의 은사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지식의 은사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폐하여진다는 말은 지식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지식이 다 없어진다면 천국은 바보들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에서 지식이 더 증대될 것입니다. 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천국이 희미하지만 그때는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현대식 유리 거울은 1835년에 독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거울은 청동에 광을 낸 금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비추면 아주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희미하다는 말이 수수께끼,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지금 내 자신을 아는 것이 수수께끼와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퍼즐 조각 몇 개를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수수께끼를 풀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퍼즐 조각 하나 들고 아는 체 하지 맙시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알 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면 더 분명하게 알 게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던 것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수순이 어린 아이와 같을 뿐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바룩 스피노자는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행동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행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민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러분! 사랑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므로 존재합니다. 욥기 42:3에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욥기를 지혜서라고 합니다. 욥과 세 친구는 당대 최고의 지혜자들입니다. 욥은 지혜자 중의 지혜자입니다. 지혜자들이 머리가 터져라 싸웠습니다. 그런데 끝에 얻은 것은 상처뿐이었습니다. 결론이 없습니다. 논쟁이 끝난 다음에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욥이 고백한 말은 “제가 알지 못한 것을 말했습니다.”입니다. 지나가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자랑하며 살지 말고 사랑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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